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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노동. 엄청나다.
모든 지성과 땀이 총력을 다해 이룬 결과이리라. 
그것은 저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 특히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록으로 남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노고(노동) 역시 담겨 있다. 책은 단순하게, 지성만을 담은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까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의 노동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노동 자체의 신성함과 별개로 노동의 결과물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노동과 그 결과물은 별개의 것이다. 영화가 그렇듯 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좋은 것만 말해도 부족할 판국이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가 말이다.
나쁜 책 혹은 쓰레기라고 불려도 시원찮을 책까지 시간과 공을 들여 말하는 건, 피곤한 일일 수 있겠다. 

이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
그래도 말해야겠다.
저자가 나름 책을 위해 쏟은 시간과 노력, 노동은 분명 존재하고 인정하겠지만,
그 결과로 나온 이 책, 설익다못해 썩었다.
자신의 주장을 펴려고 조사하고 알아봤다는데,
그걸 뒷받침하는 근거, 조악하고 비약투성이다.

특히, 이 책, 완전 위험하다.
불온해서 위험하다면야, 이 불한당 같은 체제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인가 해서 반가워하겠지만, 
이 위험은, 이런 경우다.

고기가 썩었는데, 어떻게든 팔려고,
나쁜 걸 감추려고 소스 등으로 간을 듬뿍쳤다. 
그러니 마음의 복통을 일으키고,
삶을 혼선에 빠트릴 위험이 잔뜩이다.  
고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도축업자가 아니라,
어설프게 칼만 들 줄 아는 정육점 종업원이 칼놀림을 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래,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나도, 근거를 들어야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그토록 강조하고자 했던 인문고전. 
요즘 이른바 '대세'의 일환으로 자리잡은 장르인데, 백번 양보해서 강조하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더 나아가, 알맹이도 없다. 

이 책, 지겹도록 '천재'를 들먹인다. 강박관념처럼 천재에 집착한다. 
우리가 그토록 천재를 열망했던가, 착각할 정도로, 이 책은 '천재 나팔수' 노릇을 한다. 
평범한 아이가 어떻게 천재가 됐고, 천재가 세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데, 그 천재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거의 오롯이 인문고전. 다른 이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이 힘들게 찾아낸 결정적인 무엇도 아니요, 무조건 인문고전을 많이 읽었단다. 그것이 다다.

책의 너스레는 한마디로 호들갑의 극치다. 한 구절을 보자.

"...1만 엔권 지폐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위대한 교육가로 칭송받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네 살이 되도록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스물 다섯에 에도(동경)에 게이오 대학의 기원이 되는 학당을 열 정도로 진보한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약 10년 사이에 바보에서 천재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비결은 다름 아닌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였다." (p.48)

하급무사의 아들.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 이것들이 어떻게 '바보'로 단정지어질 수 있는지, 모른다. 저자만 알려나?

그리고 게이오 대학의 기원 학당을 연 진보한 지식인. 그것을 천재로 단순 설명한다. 그가 말한 천재가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은 이렇듯 엉뚱한 논리와 결론으로 늘 치닫는다.
우리 교육의 문제를 들먹인다. 초중고 12년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커녕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오는 문제.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바보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둔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이 내린 결론은 고작 이렇다. 

"학교는 다녀야 한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최고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시스템을 거론하는가 했더니, 그 결론이라는 것이 최고의 학교를 다니라는 충고다.
돈과 권력이 있어야면 이른바 '명문'도 다닐 수 있는 현실을 모르는 건지, 한심한 충고다.
책은 아예 맛이 가기로 결정한 양, 한 방 더 날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는 없다!"

빈민들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를 들면서 책은 아래와 같은 억지주장을 편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문맹을 천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지능이 낮은 아이를 천재로 변화시킨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평범한 학생들을 아이비리그 졸업생들보다 뛰어난 인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둔재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다. 

나는 이 책이 말하는 '천재'라는 단어가 무엇을 가르키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내가 둔재고 지능이 낮아서 그런가 본데, 책에 의하면, 나는 인문고전 독서가 부족한 탓일 게다.

그러면서, 책이 내놓은 확신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만일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제대로 정착하면 우리나라는 유대 민족보다 더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함은 물론이고 천재들을 지속적으로 길러내게 될 것이라고."(p.84)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정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천재, 노벨상 수상자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은 그저 우격다짐이다. 

아울러, "인간은 본래 천재로 태어난다는 것이 교육학의 정설"(p.92)라고 주장하는데,
교육학 전공한 분들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진짜 그런지, 나는 궁금하다.

이 얼치기 인문고전 동기부여 책은 천재 타령을 부자 타령으로 옮기며 자폭한다. 

돈, 지금 시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책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인문고전 독서와 돈을 결부시킨다.
저자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자본주의니 부자니 투자니 하는 말을 싫어함을 전제로 하고 이 말을 꺼낸다.  

"세상에는 인문고전 독서에서 얻은 사고력과 통찰력을 '돈'과 관련된 쪽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세계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p.113) 

인문고전을 통해 사고력과 통찰력을 기르고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돈과 관련된 쪽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 다른 문제다.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 그게 인문고전의 사고력과 통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인문고전이 그저 '클렌징 폼'이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포장'일 수도 있다.

인문고전이 돈을 벌게 해 준다는 식의 주장은, 인문고전의 힘을 강조하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인문고전의 힘을 개무시하고 되레 좁게 만드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도 비약한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인문고전 독서광이자 저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문고전 독서로 다져진 사람들의 두뇌에서 나왔다. 이는 인문고전 독서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고, 부를 쌓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p.114)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지금 그 부작용이 '미친놈 널뛰기'하듯 불거져 나오는 상황이고,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면서 새로운 시작이 요구되는 시점인데, 책은 오히려 그런 움직임에서 역행한다.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의 본질조차 모르는 '무식쟁이'임을 스스로 토로한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자세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가 맞닥뜨렸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책은, IMF가 이런 시절부터 인문고전 독서광이었던 천재 경제학자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단다.
그래서, 그 경제학자 이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미친 경제학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IMF위기 때 우리나라가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거란다.
기똥차다. 이런 논리의 비약, 인문고전 독서가 알려준 혜안인가?

물론, 커밍아웃이 없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신도임을 고해성사한다.
신자유주의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대한 반쪽 평가('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만 언급하고선, "신자유주의의 역사는 곧 인문고전 독서가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책은, 욕 먹는 한이 있어도 외치겠다고 부득불 우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 왜 케인스나 하이에크보다 더 위대해지거나 동등해지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서구 경제학자들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데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였느냐고.
서구 경제학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한국만의 경제학을 만들지 못하면 영원히 금융 종속인 상태로 살아갈 거라고.

"한국 경제학계의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또는 이순신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 영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제넘은 이야기들을 했다. 혹시라도 반감을 가진 독자들은 내 치우친 열정을 용서하기 바란다."(p.125)

그건 열정이 아니다. 과도한 비약이다.  
또라이도 불온하면 좋은데, 이건 불온이 아니라 체제순응적 깔때기 짓이다.  

나는 의심까지 한다. 재벌가에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은 설마 아니겠지? (실제로 저자는 강연에서 재벌그룹 일환에게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책은 이병철, 정주영을 제대로 섬긴다. 이병철이 '인재경영'이란다. 『논어』에서 비롯됐단다.
정주영은 '의지경영'으로 추켜세운다. 『채근담』과『대학』 등의 고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그리고 경영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병철, 정주영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인문고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상한 주장은 곳곳에서 등장한다. '천재'만큼은 아니겠지만, 인문고전 쫌 읽었다는 양반이, "수신修身은 내팽개친 채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바뀌어야 한다는 식의 어려운 주장을 내세우는"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는 젬병이다. 그래놓고선 천재의 뇌구조를 들여다봐서 얻은 결론이, 고작 부자 되세요?  

그래, 책의 말마따나,
나는 '돈 있는 사람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부자는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빈자는 갈수록 더 빈자가 되는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다.
책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히 묻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그래, 말해주마. "《리딩으로 리드하라》 읽었다. 토 나올 뻔 했다."

더 나쁜 건, 첩첩산중인건, 종교적 근본주의자 면모까지 덧붙인다는 거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고 천재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 중 불행한 삶을 산 이들은 『성경』을 부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p.103)

책은 그 예로,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성격장애로 고생했다는 등의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를 든다. 더불어, 『성경』을 부정했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시대의 천재들도 많다고 덧붙인다.

대체, 어떤 조사를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나는 책이 담은 멘탈을 심히 의심한다.
하긴, 책은 진짜 자신의 생각 따윈 없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주장을 자신의 것인양 내세워 그것이 옳다는 것만 내세우고 싶은 거다.

인문고전을 읽는 것만으로 천재가 되고, 화폐를 긁어모으고, 리드할 수 있게 되는 사회?
조까라 마이싱. 인문감수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면서 있는 척 위장하는 게 더 나쁘다.  

인문고전의 진짜 힘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인문고전은 살아가는, 자신을 자신답게, 타인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게 하는 힘이다.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다.

뭣도 모르면서 찌껄이는 건 나도 매 한가지겠지만, 책의 주장은 한 없이 위험하다.
보아 하니, 꼴통 신자들 이미 양산해 놓고 있는 모양새다.
아마도 책이 말한 주장대로 따르자면,
이들이 이지성을 멘토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천재들이 될 터인데, 심히 관심 끊을란다.
늬들끼리 리드 잘 해보시고, 나는 빼주시라.

마성의 김꽃두레(tvn 코미디 빅 리그 <아메리카노>의 안영미 캐릭터)가 말한다.
"이런, 리딩으로 초딩 되는, 허~접 같은 경우를 봤나~" (꼭, 꽃두레 톤으로!)
부릉부릉, 할리라예~

이 책,
별 한 개도 아까우나, 백만 스물 두 번 양보하여, 인문고전 독서를 권장했다는 점에서, 에라~ 선심 썼다! 별 한 개 정도는 주겠다. 읽지 말라는 얘기다. 쉬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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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김현진.
건재하도다. 이 씩씩한 언니.
어디선가 사회적 약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언니.
 
나, 김현진 팬! 
새로 출간한 《뜨겁게 안녕》 독자만남.
응모했고 뽑혔다.
홍대의 커피하우스, 살롱드팩토리. 사실, 이곳의 커피는 내겐 별로지만.  

그녀, 여전히 멋있고, 아름답다. 
알코올 의존은 여전한 듯하며, 수줍고 여리고 참 약하면서도, 그래서 강한 여성.

뭣보다 김현진은 김현진이다. 다른 어떤 설명도, 사실 필요없다.
그녀는 그녀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으로.
그래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포장도 않는다. 거듭, 멋있다.

10여 년 전부터 기사나 글을 통해 보아온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산다. 온전하게.
당연, 인간적인 결함 있(을 것이)다. 변덕도 죽 끓으며, 우울도 달고 산다.
그래서 술은 그녀에게 좋은 친구다. 그게 뭐 어쨌다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를 향해 수근거린다.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현진, 상처 입었고, 상처 입는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녀는 '자기마음주의자'.
많은 우리는 남들이 하는 뒷담화나 수근거림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사나.
그래서 끊임없이 포장하고 분장하고 변장하기 바쁘다. 마음도 성형을 하는 세상.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숨기지 않는다. 가리지 않는다. 포장하지 않는다. 그냥 직구.
자신의 두 발로 또박또박 앞으로 나간다. 덤벼라, 세상아.

그녀(의 글)를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온전하게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타인 아닌 내 인생을 누리고 있는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많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 '진짜' 삶을 살고 있니?"

물론, 그녀는 그런 것, 의도하지 않는다.
김현진은 그저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니까.

아마도 그녀, 헤밍웨이의 이 말을 체화하고 있다. 
"내가 아닌 것으로 사랑받느니, 나 자신으로 미움받겠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아닌 것으로 사랑받고자 원하는가 말이다. 미친 듯이.

우산도 없이 빗속에 뛰어드는 마냥, '진짜' 삶으로 뛰어드는 그녀, 김현진 스타일.
쩐다! 간디작살. 아름다운 '김꽃두레'양 표현을 빌자면, 마~돈나 섹시해. 

소설을 쓰고 싶은 그녀, 언제고 소설을 낼 것이고, 꼭 그러길 바란다.
그 소설, 대중을 자극하든 아니든, 나는 그것이 한 인간의 기록임을 기억할 것이다.
'한 인간'을 벗어나 대중이 된, 지금의 인간에게 그녀는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왜? 김현진이니까!

김갑수 선생님이 피아니스트 리히터(리흐테르)를 경배하며 하신 말씀 인용하자면, "대중의 사랑과 선망으로 높낮이가 구분되는 '인기'와는 다른 영역"에 김현진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녀는 '비주류'가 아니라, 대중 아닌 '한 인간'으로 존재한다.

다시 김갑수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깊이, 인간의 크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녀의 애정, 서울과 술. 그것과 함께 영원하길.

2009년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하다.


코시 판 투테(cosi fan tutte, 이것이 여자라는 것이다).

이 자리가 더 좋았던 이유.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남긴 고종석 선생님이 오셨고,
(고샘은 김현진의 아버지다. 문화적 DNA를 물려준 아버지. 부럽다!)
내 사랑하는 <씨네21>의 초대편집장이자 소설가 조선희 선생님도 오셨다.(씨네21에 싸인을 받았다. 소설이 완성됐다고 들었다. 기대한다고 말씀드렸다.^^)

이 훈훈한 공기하곤.
나는, 남의 시선에 포박당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오늘,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선희 선생님도 그래서 좋아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니 다행이다.

언젠가는, '뜨겁게 안녕'할지라도!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보내도다.


슬픔
그 어느 해의 마지막 날.
나는 한 커플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다.
그들은 이별을 택하기로 했고, 12월31일을 거사일로 택했다.

헌데, 그들은 증언자(?)로 나를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내게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그날부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시 애인이 한국 아닌 먼 곳에 있던 나.
함께하자는 제안에 고맙다며 굽신굽신, 종각에서 폭죽을 함께 즐기고 쏘다녔다.
뉴이어는 그렇게 밝아왔건만.

그리고 그들, 헤어졌다. 
내 대학시절 참 좋은 파트너였던 녀석은 다음날에야 그것을 실토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글쎄, 정확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단 하나의 이유도 아닐 것이다.
다만, 내 어설픈 기억으로 당시 녀석의 집안형편이 큰 걸림돌이 됐다.
그렇게 죽자사자 붙어다니던 그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늘 보기 좋았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놈, 그렇게 허술한 것일까? 아니, 사랑이 아니었던 걸까? 

녀석은 상처가 깊었다.
녀석은 오랫동안 그녈 잊지 못했고, 그 사이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 한편으로 녀석의 여자에 대한 불신도 깊었다.
일반화 하지 말라고 했지만, 녀석의 상처는 오래 갔고,
다른 여자와의 관계는 서툴기만 했다.

그런 녀석이 한 달 뒤 결혼(식)날짜를 잡았다고 연락을 했다.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어어어~ 하다가 얼렁뚱땅 결혼하게 됐다고.

글쎄, 지금 여자와 녀석의 관계. 잘은 모른다.
다만 녀석의 말이 슬펐다.
"형, 결혼한 친구들 말 들어보니, 다 그렇게 어어~하다가 결혼하는 거라더라. 다 그리 한다 하더라. 뭐, 나도 그리 됐네. 하하."

내가 알던 녀석은 자신만의 생각과 삶을 살았던, '비주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주류'가 됐다. 
축복해야 하는데, 축하를 하면서도 나는 한켠으로 슬펐다. 녀석이 아팠다.
결혼이 아프고 슬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에 자신을 대입시킨 녀석이 슬프고 아팠다.

그래, 오해겠지만,
녀석은, 아직 그 상처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그것이 나는 슬프다.
부디, 잘 살아라. SJ야. 그래도 나는 늘 네가 고마우니까.
너와 함께 꿈꾸던 그 시절을 나는 잊지 못하니까. 그건 내게 아직 유효한 꿈이니까.

그래, 뜨겁게 안녕.
너와 나,
우리의 뜨거웠던 청춘 1막은 그렇게 접혔구나...

코닥의 파산이 '필름 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면,
너의 결혼은 '꿈의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래서, 뜨겁게 뜨거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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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3주기 추모 행사
: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6&id=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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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나보다 가족(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기엔 어린 나이다.
그러나 11살 줄리안은 커서 배우가 돼 돈을 벌어 가족을 돕고 싶단다.

엄마는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임 파인(I'm fine), 괜찮다고 이 소녀, 웃었지만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11살 소녀다.
어찌 괜찮을 수가 있나. 그건 평생 괜찮지 않을 상처인데.

아이 해브 어 드림. 꿈을 그리고 있다. 이 소녀.  
돈을 벌어 밑의 세 동생들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다짐도 한다. 

꿈을 이루겠다고 약속한다.
그 약속,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13살 한국의 소녀도 있다. 



줄리안 로렌쇼.
한국 아이쿱생협 조합원들이, 그들이 건립한 공정무역 마스코바도 설탕공장의 첫 설탕 생산 공정을 보기 위해, 필리핀 빈곤율 2위의 파나이섬을 찾았다. 

그들과 사흘동안 부대끼며 지냈던 11살 소녀는, 그들이 떠나자 이내 그들이 그립다며 눈물을 펑펑 흘린다. 

KBS2TV < 다큐멘터리 3일 : 달콤한 공생 - 파나이 섬의 이상한 설탕공장>

필리핀 파나이 섬에 안티케 빨간지붕의 설탕공장이 만들어졌다.
좋은 품질의 사탕수수로 유기농 설탕을 만들 수 있는 그곳은, 공정무역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행복하자는 모토의 공정무역.

줄리안에 감정적으로 꽂혀 단순히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줄을 잇겠지만,
지속가능한 삶(사회)과 사회 인프라 확충 등 공정무역이 지닌 진짜 의미와 그들을 빈곤에 빠트린 주류 경제(무역)구조에 대한 사유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공정무역 커피를 내리고,  
미욱하지만 공정무역과 관련한 활동을 계속하는 건,
그것이 우리가 지금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정무역 커피를 통해 세계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세계는 우리의 일부임을 확인한다.

부디,
의사나 교사보다 마스코바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년의 꿈이 이뤄지길. 가족들을 돕고 싶다는 줄리안의 꿈이 열매를 맺길.

그 꿈에 당신의 흔적이 보태지길.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공정무역 제품을 통해 당신은 그들과 맺어질 수 있으니까. 그것이 내가 아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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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도시였다. 도시. 내게 급작스레 던져진 화두. 태어나서 지금까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 없었다. 부산과 서울. 군대조차도 행정구역상 서울이었으니, 나는 저 두 곳에서 줄곧 서식하고 있다. 스물 셋, 잠시 미국에서 6개월을 꿈처럼 보냈던 외에는. 

부산과 서울. 이 도시(들), 딱히 좋아한 것 같진 않지만, 익숙했다. 물론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고는 있다. 평생 살고 싶은 곳은 아니거든. 서울은 너무 빡빡하고 대체로 권위적이다. 드물게 반짝반짝 빛나는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부암동. 그곳은 서울(의 일부)이라기보다 그냥 부암동이다. 나는 그저 이 도시가 그닥 매력적이 아니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내 사는 곳이 도시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도시'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고작해야 시골의 대척점으로서 도시를 떠올린 정도?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 말, 그래서 도발이었다. 아니, 왜? 강하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제목, 섹시했다. 들추고 싶고, 벗겨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봉인을 풀었다.

책을 읽는 내내, 덮고 나서,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왜? 서울은 걷는 것을 박탈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요즘 걷기 열풍이라 서울에서 걸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걷다가 나자빠지는 소리냐고? 그러게. 그럼에도 서울은 걷기에 우호적이지 않다. 아니, 걷는 자들을 종종 능멸한다.

자, 이야기를 풀어보자. 

'걷고 싶은 거리'를 처음 접했던 건 이십대 초반. 파리가 그렇다고 했다.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겨준 고종석 선생의 파리 예찬 이유 중 하나였다. 궁금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부르는 거리라니.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런 느낌, 가져보질 못했다. 되레 그곳들은 걷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곳에 가까웠다. 차가 장악한 공간이니까. 사람은 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고종석 선생은 『도시의 기억』에서 다시 파리를 꺼냈다. "파리는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였다. 오밀조밀한 볼거리들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공기 전체가 걷기를 유혹했다." 그는 파리를 허송하면서 도시 한쪽 끝에서 맞은 편 끝까지 걷는 날도 있었다고 했다. 해찰하며 느릿느릿 걸었다고 했다. 오래 전, 짧게 들른 파리를 다시 가고 싶었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런 걷기를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파리를 걸으면서 낭비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에 '걷고 싶은 길'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오세훈이 '디자인'했던 서울은 그런 풍경을 낳았다. '걷고 싶은 길'을 통합해서 관리하겠다고 했었다. 헌데 걷고 싶은 길, 참 애매한 말이었다. 시민들이 걷고 싶은 것인지, 시민들에게 걷고 싶어지도록 만들겠다는 것인지. 자동차에 점령당해 걷기 힘들게 만들어 놓을 땐 언제고. 변덕쟁이들.

더 큰 문제. 걷기 혹은 보행환경에 대한 진단과 해결 차원이 아니었다. 오세훈은 거리 특성화나 디자인, 보도 포장 교체 등 보여주기 식 사업에 치중했다. 걷기 혹은 도시에 대한 진중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세훈의 '디자인 서울'은 그랬다. 도대체, 서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차들이 자꾸만 인도로 올라오는 것이 불편했는데, 책은 역시나 그것을 꼬집는다. 그것이 도시를 망가트리는 것임을. 인도에 주차를 하는 야만적인 행위부터 규제하는 것이 디자인 거리 조성의 첫걸음이란다. 인도가 주차장으로 변모하는 현실. 그것, 걷기를 소외시키고, 도시 디자인에 삑살이를 놓는다.

도시를 판별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섹스 앤 더 시티>. 네 명의 여성들이 펼치는 뉴욕라이프와 스타일을 보여주는 드라마. 그 가운데,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구두에 유독 꽂힌 이유는 뭘까? 마놀로 블라닉의 명품적 권위 때문에? 패션의 종결은 구두라서? 천만에.

캐리의 구두는 곧 걷기다. 멋진 구두로 거리를 폼 나게 걷고 또 걷는 일. 도시의 본질이자, 도시성에 대한 애정임을 책은 말한다. 즉, 걷기야말로 도시 생활의 필수이자 상징이며 기쁨이란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서울은, 걸어 다닐 만합니까?

그러니 걷고 싶은 거리는, '둘레길'처럼 산책이나 운동을 위한 길을 일컫는 게 아니다. 도시 안에서 걷도록 만드는 일이다. 다양한 상점이 늘어서 있는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는. 차들이 인도 곳곳에 포진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즉, 걷는 것에서 비롯돼야 한다. 걷는 것에서 도시를 사유해야 한다. 혹은 걸으면서.  

“걷기는 도시라는 공적 공간을 즐기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도시는 이야기책이며 걷기라는 언어로서만 해독이 가능하다”고 했다. 《걷기의 역사》의 저자인 솔닛은 “도시를 점유하는 방식은 걷기”라고 단언한다.”(p.244)

저자인 이경훈 교수에 의하면, 도시성의 최전선은 '걷기'다. 헌데, 걷고 싶은 것에 대한 오해의 지점을 잠시 지적하자. 길과 거리에 대한 구분의 모호함. 길과 거리는 다르다. 이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언어적 몰이해와도 연관된다. 

“길은 목적지향적 통로이나, 거리는 길의 일종이나 걷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도시의 영역이다. 영어로 보면, 길은 로드(Road)고, 거리는 스트리트(Street)다. 그런데 우리는 길과 거리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쓴다. 뭘 까다롭게 그러냐고 하는데, 길과 거리를 섞어 쓰는 건, 단순한 용어상의 혼용일 수 있지만, 도시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즉, 길은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적이다. 반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 지향적 성격을 띤다. 도시를 잘 모르니까, 서울시는 걷고 싶은 길과 걷고 싶은 거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도시적 걷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어딜까? 가로수길이다. 길과 거리를 명확히 구분하자면, '가로수거리'가 돼야 할 곳. 압구정동 로데오길과 폭이 같음에도, 두 거리는 차이가 크다. 이 교수는 가로수길에 없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 차가 인도에 주차하지 않는다. 인도 폭이 넓지 않아 차가 올라오기 애매하고 가로수가 촘촘하게 있어서 인도에 주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 공원이 없고 상점이 연속돼 있다. 그것이 가로구길을 대표적인 도시 거리의 모습으로 보게 한다. 거리는 자연보다 상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로수길의 처음과 끝까지 700m를 걷는 동안 힘들지 않다. 쇼윈도의 구두와 옷을 보고 카페 손님을 보는 동안 가로수길은 끝난다.

맞다. 옳소. 차가 왜 인도를 점유하는가. 인도에 차가 있는 건 특히나 불법임에도. 우리는 별다른 불만없이 차를 모신다. 왜? 다들 차를 가진 사람들이라서? 차를 인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권리이자, 도시의 권리다. 자연스럽게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길. 그것이 도시의 모습이다. 그래서 가로수길에서 만난 유모차가 나도 참으로 반가웠다.
 

“‘서울은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라는 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의 말처럼 서울에서 걷기란 고행에 가깝다. 인도가 없는 좁은 이면도로에서는 차에게 길을 내주고 눈치를 보며 걸어야 한다. 인도가 비교적 넓은 대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자동차가 인도에 올라와 주차하려고 낑낑거리고 있어서 차를 피해 조심히 걸어야 한다.”(p.24)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당장 당신 주변을 둘러보라. 건물 앞에 차를 주차하도록 만들어서 인도를 잡아먹는 행위가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지. 서울은 그런 면에서 차와 사람과의 관계가 여전히 반도시적이다. 건물-자동차-사람-자동차의 배열.

서울에서 걷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눈치를 봐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더 많은 가로수길을 만들자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반갑다. 가로수길과 같은 비싼 거리를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차에 종속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싶은 그런 거리.  

“자동차를 피해 조심스럽고 불편하게 걸을 필요가 없는 안전한 거리는 상점의 쇼윈도와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은 ‘진짜 도시의 거리’를 만든다.… 나는 서울의 모든 거리가 가로수길처럼 바뀌길 바란다. 가로수길과 같은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는 삶을 꿈꾼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거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를 말이다.”(p.43)

아울러, 공원 등 녹화 공간에 대한 과도한 집착. 서울의 녹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을 별로 존중하거나 경배하지도 않으면서 자연, 자연 노래를 부르면서 공원 만들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꼴불견이다. 

책은 도시에서 상업시설은 필수임을 강조한다. 그게 곧 도시성이다. 도읍 都에 시장 市, 즉, 행정과 상업이 합쳐진 것이 도시다. 고로, 상업도시라는 말은 없는 법. 도시라는 말에 상업이 내장돼 있으니까. 도시는 곧 '상업성'의 다른 말이다. 헌데, 우리는 상업성이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을 가지는데, 이 교수는 그것을 '가식'이라고 규정짓는다.

나무만 심는다고 '친환경'이 아니다. 도시에는 도시환경에 맞는 건축과 조경이 있다. 친환경도 말그대로 환경에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친자연과 혼동해선 안 된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나라에선 친환경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특히나 상업성이 있어야 할 곳은 나무나 공원으로 채우고, 그렇지 않아야 할 곳은 광고로 도배질 한다. 시민들의 미감을 해치는 행위다. 개념 없고 품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쇼핑몰에 대한 비판도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몇 달 전, 신도림에 '디큐브시티'라는 거대 쇼핑몰이 들어섰다. 그런 메가 쇼핑몰이 들어설 때마다 자랑이랍시고 떠벌린다. 한국 최대, 아시아 최대,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이 그 규모에 압도당하도록, 저들은 자랑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것, 가짜 도시처럼 만든 것이다. 쇼핑몰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다. 거리를 흉내 내고, 도시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곧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전원에나 어울릴 상업시설이다. 그러니 도시는 점점 힘을 잃는다. 도시 안에서 쇼핑몰을 사유하지 못한 결과다. 더 넓고 더 크게 만들어 놓기만 하면 장땡인줄 아는 천박함이다.

과거, 나는 도시를 외따로 떨어진 개별들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은 도시성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로 공유공간을 꼽는다. 뉴욕의 예를 든다. 뉴욕의 아파트는 매우 좁아서 밥은 식당, 빨래는 빨래방, 야구경기는 바 등에서 해결한다. '홈(Home)'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바깥의 지저분함에 대해 서로 지적하고, 규율을 한다. 결과적으로 도시가 아름다워진다.   

“이렇게 최소화된 개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도시 전체를 ‘나’와 ‘우리’의 공간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아파트보다는 한 도시에 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도시 전체를 자신의 공간으로 확장하며, 자연스레 공공의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타난다.”(p.125)

도시성의 의외의 발견이다. 헌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유공간의 기회를 숱한 '방'에 뺏긴다. 가령, 노래방에 가는 건, 아는 사람과 함께다. 뉴욕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이웃과 사귈 수 있는 계기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과시적이거나 그것이 뉴욕 라이프인양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업시설은 접촉의 기회를 줘야 하나, 우리는 되레 그것을 과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장담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의 서울이, 당신의 도시가 달라질 것이다. 책 제목에 완전 공감할 것이다. 서울로만 한정할 필욘 없다. 당신의 공간, 자체다. 당신의 시각과 관점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이 책은 서울을 비판하는 것보다 서울에 대해 애정한다. 도시를 애정한다. 내가 사는 공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애정을 보태는 일이다. 

서울이 도시겠거니 살았던 나나 당신이나, 도시와 서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만큼 책이 주는 충격이 만만찮다. 낯설게 보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책의 장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넓어지고 감각이 열린다.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2011년, 다양한 책을 읽었다. 사유를 가능케 한 좋은 책들도 많았고, 쓰레기 같은 책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2011년의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손에 든다. 도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시장 선거도 있었는데, 나로선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시장후보가 내 서식지를 도시로서 손색없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둘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내가 서울에 살게 될지는 모를 일이나, 나는 내 사는 동안 서울이 도시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됐으면 좋겠다. 뉴타운으로 범벅된 토건의 공간이 아닌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도시를 꿈꾸는 일, 나쁘지 않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말했다. "도시는 소년이 일생 동안 거닐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교시를 찾는 곳이다." 거닌다고 했다. 교시를 찾는다고 했다. 도시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서울이, 혹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각자의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지만, 우리는 그 우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공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교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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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욜 열리는 수요 집회가 1000회를 맞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한 평화비도 세워졌고.

20년이다. 20년.   
1992년1월8일 수요일, 당시 일본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집회의 나이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만20년이 된다.

그래, 20년, 1000회.
연 인원 5만 명 규모로 커지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사실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다. 되레 서글프고 억울하다.
20년, 1000회를 바꿔말하면,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생존해 계시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도 234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눈치 보시느라 그런지, 사과나 배상 요구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거나 말거나, 그런 피해 국민이 집회를 하거나 말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초지일관.

다만 위안이라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희망 승합차'를 마련했다는 것.
낡고 잔고장 많은 승합차를 새로 바꿨단다. 시민들이 푼돈을 모아 그리 했다.

실은 협의회에서 자동차회사들에 후원을 요청했다.
올해 돈 엄청 긁어모았다는 현대차가 0순위였겠지.
그런데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다'면서 후원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건 어떤 맥락인가!
보다 못한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한두푼씩 모아 할머니들의 승합차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국가나 대부분 기업은 '사회'와 동떨어져 따로국밥처럼 노는 잡놈들 같다.

수요집회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수요일마다 할머니들과 인민들이 집회를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더구나 이런 추운 겨울날에!
그냥 집회 말고 잔치나 축제 같은 거나 한다면 모를까.
집회가 없어지는 날은 바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이뤄졌단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평화는 이토록 모질고 슬픈 과정을 거쳐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63명의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그 과거는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인가. 개새끼들.

세상은 절망이 아닌 적이 없다만, 절망을 삶의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오늘 또한 허그데이니까, 마음으로라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꼬옥 안아주시압.

평화롭고 착한 멜로디를 지닌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E장조 K.261' 들으시면서,
편안한 겨울밤. 굿럭,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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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말부로, 지구는 70억 명을 품었다.
60억 명을 넘어선 지 12년.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10억에서 20억까지는 10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20억에서 30억은 32년이 걸렸다. 1987년부터는 매 12년마다 10억 명씩 증가한다. 지금,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기 위해 응애~하고 태어나는 아이는 1초에 2.5명, 1분에 150명이다. 그리 보면, 100억 명도 멀지 않다. 2050년경이면 그리 된다는 전망이다. 

그것으로써, 나는 내가 가끔 꺼내던 말을 바꿔야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진실이 있다. 전 세계에는 60억 개의 진실이 있다는 말을 70억 개의 진실로. 내가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의 실체는 더 늘었다. 구체적인 존엄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과연 지구는 그렇게 생각할까? 아닌 것 같다. 그 전에도 세계의 절반은 굶주렸다. 아마도, 늘어난 인구만큼 굶주림의 숫자도 비례해서 늘었을 것이다. 이른바 문명은, 애 낳기의 혹독함을 안다.

지구상 30억 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산다. 
10억 명은 깨끗한 물조차 마실 수 없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 하루 1.24달러 이하의 빈곤선 아래 10억 명 이상이 있다. 그 때문에 5초에 1명, 하루에 1만8000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하루 8달러, 우리 돈 1만원 안팎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2/3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와 닿는가? 
주로 수치로만 언급되는 이 비극 앞에,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많은 사람들, 그렇지 않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다를 것이다. 많은 구호NGO와 개인의 노력에 현금 연대 등을 통해 동참하거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며, 공정무역 초콜릿을 먹지? 그렇지? 

그러나 그들, 허구헌 날 뺑이를 쳐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없다.
경제적 수준으로 층위를 나누자면, BOP(Bottom of Pyramid). 하루 8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 생존이 모든 문제에 앞서는. 많은 우리를 속박하는 '먹고사니즘'과는 차원이 다른.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2015년까지 전 세계 빈곤인구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UN 새천년 개발목표(MDG)' 달성을 위한 협조를 제안했다. 국제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지만,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채무위기)때문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넥스트 마켓》은 BOP시장의 비즈니스 기회에 대해 언급하는 책이다.
지구를, 삶의 구체적인 실체를 살리는 일과 비즈니스의 결합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돈이 안 된다고 무시했던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려준다. 적정기술도 그것이다. 당장 싸다는 것만 강조하고선, '통큰' 혹은 '착한' 등을 붙이고선, 또 다른 착취와 훼손을 교묘하게 감춘 자본들의 행태와는 다른 무엇.

그것 아나? 첨단기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지 못한다.  
많은 우리는 첨단기술에 열광하고 환호하지만, 그것이 지구의 이상과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인류의 미래? 도그보이스다. 생각해보라. BOP에게 필요한 것은 첨단기술이 아니다. 딱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딱 한뼘만큼만 삶을 향상시킬 수만 있어도 좋은. 그렇다. 적정기술이다. 스마트폰은 그렇다면 적정기술일까? 그건 당신의 몫으로 남기고. 

나는 여전히, 적정기술로 만든 커피를 꿈꾼다.
그리하여, 적정커피. 적정기술로 로스팅한 당신만을 위한 커피. 어때? 기다려줄 거지? 모처럼, 적정기술을 다시 떠올리게 한 시간이었다. 그때 만든 자전거발전기는 잘 있을까? 

생명을 구하고, 삶을 향상시키는 기술, 적정기술

『넥스트 마켓』 적정기술포럼


2년하고도 반년 전, 경남 산청.

버려진 자전거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뚝딱뚝딱 공구 두드리고 박는 소리가 퍼졌다. 자전거발전기의 탄생.

나를 비롯한 문래예술공단 랩39의 몇몇 멤버들이 자전거를 옆에 끼고 낑낑대고 있었다. 나로선 처음 만난 적정기술.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전거에 에너지를 발생할 수 있는 장치만 부착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이었는지 확인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페달을 밟아 전력을 발생하는 자전거라니,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나를 적정기술의 노동현장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게 적정기술로 제작된 자전거발전기는, 문래예술공단에 자리했던 내 첫 번째 인디커피하우스 ‘골목길 다락방’과 함께 숨을 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이 페달을 밟았고, 나는 그 전력을 활용해 공정무역 생두를 로스팅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진 못했다.

다만 언젠가, 자전거발전기로 내 커피콩을 지지고 볶는 꿈을 꾸고 있다. 물론 그 적정기술로 커피의 맛과 향을 잡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또 어떤가. 적정기술이 돋아낼 원두의 향과 맛 또한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AT)이란 무엇일까. 위키백과의 정리다.


지난 11월15일,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 ‘적정기술포럼’이 열렸다. 소외된 90%의 삶을 향상시키는 기술, 보편화된 기술과 실용적인 디자인의 융합으로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을 질을 향상시키는 적정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 시간. 적정기술과 BOP(Bottom of Pyramid, 피라미드의 밑바닥인 최하 소득계층을 뜻하는 말)시장을 다룬 책 『넥스트 마켓』의 이야기와 맞물린 포럼이었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적정기술 개념 소개 및 기술개발’을 주제로 유영제 교수(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가 첫 번째 강연자로 등장했다.

그는 지난 3년 간 경험한 이야기를 통해, 과학자로서 과학기술의 사회실천적 고민을 털어놨다. 과학기술이 과학이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사유. 가난하거나 나이가 많은,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 등에게 과학기술이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있는 여정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2008년 1월 필리핀에 갔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필리핀의 농촌을 찾았다. 한국인 안내자는 필리핀 농촌 사람들의 피부가 나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병원은 비싸서 쉬이 갈 엄두를 못낸다. 그래서 한국의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주면 쉬이 낫는단다.

유 교수는 왜 피부병이 생기냐고 물었다. 더러운 물 때문이었다. 과학자인 유 교수의 생각에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제공하는 것보다 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없는 과학자회의 탄생이 꿈틀댄 계기였다. 

“동료 교수에게 이 얘길 했더니,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수소문을 해서 이야길 나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 중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물이라고 하더라. 물에 대한 심포지엄을 했다. 혼자 할 것이 아니라 여럿이 협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년 전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를 만들었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본떴다.”

적정기술은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물을 예로 들자. 우선 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따져야 한다는 것. 적정기술로 만들어진 ‘큐 드럼(Q-Drum)’이 그렇다.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물 부족 때문에 아이들이 혹사당하는 일이 많다. 수차례 물을 길러 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퀴 달린 Q-Drum은, 한 명이 하루 50ℓ의 물을 단 한 번 왕복으로 길어 올 수 있다. 울퉁불퉁한 곳에선 이도 무용지물이라고 하자, 다른 누군가가 이를 개선한 제품도 만들었다. 적정기술의 진화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러 가는 이야길 들었는데, 비용이 많이 들진 않는다더라. 그런데 캄보디아는 우물을 파면 반은 비소가 섞여서 마시지 못한다더라. 그래서 요즘은 수질 검사를 하고, 비소 없는 우물을 파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빗물이 안전하다고 그것을 받아주는 활동, ‘비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순히 빗물을 받아주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A/S를 하고, 주민이 함께 하고, 예술가를 참여시키면서 진화하고 있다.”

“비즈니스와 시장으로의 접근만으로는 가난을 멈추게 할 수 없다. 빈곤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어, 각각의 사례에 맞는 유연한 해결책이 필요하다.”(p.12)

유 교수가 강조하는 지점은 교육이다.

물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선 주민들이 수자원을 아끼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을 해야한다는 것. 또 비소를 제거할 수 있는 값싼 기술을 개발하고, 근본적으로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농업이나 화장실 시스템을 바꿔주는 것도 중요하다.

적정기술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에 아주 효용이 있다. 고가의 첨단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외려 그런 것은 효용이 떨어진다. 태양열을 이용한 오븐이나 항아리를 저장고로 활용하는 적정기술도 있다. 다만 항아리 저장고의 저장이 하루 정도밖에 안 되는 건 단점이다.

“과학기술사를 보면 물을 깨끗이 하고 상하수도 시스템을 갖추고 냉장고가 발명된 이후 인간 수명이 20년 늘었다. 깨끗한 물과 냉장고가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냉장고를 갖다 줄 순 없지만, 3~4일 혹은 일주일 정도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전기가 필요 없는 냉장고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네트워킹을 만든다는 것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부작용이 있다. 가령, 비료를 원조 받아서 농사를 지으면 안 된다. 비료가 끊어질 경우, 농사는 막히고, 땅에도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연친화적 농업 등을 전수해야 한다.

“빵과 돈을 갖다 주면 끝없이 가져다 줘야 하기 때문에 자립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게 교육이고 기술을 가르쳐줘야 한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가보니 망고가 많았다. 건조시키는 것만 알려줘도 경제적 수익이 생기고 배울 수 있는 돈도 생기더라. 굿네이버스 등에서는 돈과 빵이 아닌 지역사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의 혜택을 보게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값싼 보청기를 보급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적정기술은 20~30년 전에도 붐을 탔던 바 있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붐을 타고 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기술이 누적되고 태양에너지의 상업화 등 좀 더 현실화된 기술이 많아졌다.

유 교수는 과학기술,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한국NGO가 현지 NGO와 연결돼 도움을 줬으나, 기술이 없었다. 이에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들이 현지와 네트워크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과학기술(자) 네트워크의 확산이 중요한 이유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 있다. 이런 것은 과학기술만 하는 사람뿐 아니라 경영경제, 디자인, 그밖에 관심 있는 지식인 등이 협력해야 시너지가 생긴다. 요즘은 디자인 공부하는 사람도 조인하기를 희망하더라. 글로벌 이슈를 생각해볼 수 있고,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도 할 수 있고, 창의성과 협동성도 길러져서 교육적이다. 이런 것이 진짜 공부다.”

그는 동아일보 9월30일자에 나온 <“캄캄한 네팔 오지에 희망의 빛 선물”>을 하나의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관심이 커지고 있는 사회적기업. 공학하는 사람만 모일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협력과 네트워킹을 통해 세계를 좀 더 고민하면서 나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정기술은 어떻게 개도국과 만나는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많은 여성과 아이는 물을 긷기 위해 10리터에 달하는 물통을 들고, 왕복 네 차례 여정을 한다. 어떤 지역에선 하루 평균 4000명의 아이들이 깨끗한 식수를 구할 수 없어 죽어간다. 개발도상국의 80%는 전기를 공급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등유는 가스과대 흡입 혹은 화재로 연간 1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개발도상국에는 안경도, 안경을 맞출 검안사의 수도 턱도 없이 부족하다.

앞서 말한 Q-Drum은 여성이나 아이들의 수고를 덜고, 휴대가능한 정수기인 LifeStraw은 효과적으로 수질 속 박테리아를 제거해, 물이 부족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한다. 간단한 태양광 램프를 이용한 제품은 가스흡입으로 인한 죽음을 줄이고, 해가 진 뒤에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든다. Ad-specs는 검안사 없이 자동으로 초점을 조절할 수 있는 맞춤 안경이다.

적정기술이란, 이렇게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의 질을 저비용으로, 혁신적으로, 지속가능하게 향상시킨다. 그렇다면 적정기술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세계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적정기술 플랫폼 ‘코페르닉(Kopernik, http://kopernik.info)’을 운영하는 토시 나카무라 대표가 다음 강사로 나왔다. 그가 CEO로 있는, 코페르닉은 ‘소외된 90%를 위한’ 기술을 소개하고, 이를 보급하는 사업가, NGO, 기부자를 연계하는 사이트다. 코페르닉은 적정기술의 보급에 집중한다.

코페르닉을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었다. “많은 훌륭한 기술들이 있지만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사용자는 기술을 부담할 여력이 없고, 제작자는 먼 지역 사용자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 결국 기술을 소개하고 도입을 조성할 방법이 없다.”

이에 훌륭한 기술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취지로 코페르닉은 2010년에 설립됐다. 쉽게 말해, 코페르닉은 온라인 기술거래소다. ‘링크’역할을 하는 것이다. 초점도 명확하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의 연결.

그렇다고 코페르닉이 중간에서 마진을 챙기진 않는다. 지역NGO와 직접적인 연계로 더 많은 후원금이 최전선에 닿도록 한다. 특히 절대 빈곤의 사람들이 실제로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을 선택해서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후원 품목의 선택도 가능하다.

“우리는 런칭 이후 11개국 6만3000명의 사람들에게 기술을 보급했다. 솔라 라이트 프로젝트의 하나로 동티모르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인데, 기술이 가장 닿기 힘든 지역이기도 하다. 솔라 라이트 보급으로 동티모르 사람들이 수입을 좀 더 늘일 수 있었고, 안전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도 쿡스토브를 보급해서 기존보다 비용을 50% 이상 절감했다. 그곳에선 한 달에 9달러나 되는 ‘큰돈’이었다. 

코페르닉은 멀리 떨어진 가난한 커뮤니티를 타깃으로 즉시 시장성이 없는 지역에 시장을 창조한다. 사업자에게도, 사용자에게도 모두 필요로 하는 기술. 생명을 살리고, 교육을 가능하게 만들고, 수고와 착취를 덜어주는 기술이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모두에게 이롭게 되는 기술. 그것이 적정기술이다. 지역에 맞고 형편에 맞는 맞춤형 기술. 그것이 또한 적정기술이다. 첨단기술이 아닌 적정기술에 한 번 눈을 돌려보라. 당신의 삶이 좀 더 풍부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오시라. 적정기술로 로스팅한 원두로 당신만을 위한 커피를 건넬 테니.

적정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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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디아'는 미국 뉴욕 주 퀸즈에 있는 공항이름(LaGuardia International Airport, 약어 LGA)이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JFK공항처럼 사람의 이름을 땄다.

피오렐로 라과디아, 그는 뉴욕시장을 역임했다. 그것도 무려 세 번(1934~1945). 잘은 모르지만, 진보적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을 하면서 뉴욕 시민의 사랑을 뜸뿍 혹은 왕창 받았나보다. 예술인이나 대통령이 아닌 일개(?) 시장 출신으로 공항의 이름을 차지할 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시장 이전에 판사 출신이다. (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초큼 낫지만) 판사들의 수준이 영 탐탁치 않은 한국 사람으로선, 그런 사랑,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디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여당 텃밭에서 공천을 받아, 유세 때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할머니들과 악수하고, 평소 안 먹던 국밥 한 번 먹어주며, 다리를 놔준다든가 지하철 개통을 해준다든가 말로만 떠드는 한편, 사촌에 팔촌까지 뒤져서 상대 후보 진영 약점만 밝히면, 시장이야 어떻게든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라과디아가 치안판사 시절, 한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잡혀와 재판장에 섰다. 라과디아가 말했다. "나이도 드신 분이 염치 없이 빵을 훔쳐 먹습니까?" 노인은,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라과디아,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벌금 10달러의 처분과 함께 방망이를 땅땅땅 내리쳤다. 빵을 훔친 절도 행위에 대한 판결이라며. 

그런데, 이내 그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고 이 한 마디. "그 벌금, 내가 내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나 스스로의 벌금입니다." 아마도 재판장은 웅성웅성댔을 것이다. 판사가 피고의 벌금을 대신 내줬다? 

그걸로 끝, 아니었다. 방청객들을 향한 또 한 마디. "이 노인은 재판장을 나가면 또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방청객 중에서도 그동안 좋은 음식 드신 분은 조금씩이라도 돈을 기부해주십시오." 

방청객들 '삘' 받았다. 주머니를 열었다. 모금액이 47달러. 192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 큰 돈이 아녔을까.

방점은 그가 내세운 명분, 즉 언어 사용이다. 그는 '불우이웃'이나 '가난한 노인 돕기'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앞선 표현을 썼다면, 노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방청객들도 그저 그런 상투적인 모금이구나 싶어서, 감동과 공감은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선의도 좋지만,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기. 그 딱딱하고 냉정한 재판장에서 사람을 움직인 판사라면 충분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진보시장이라고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그는 11월, 한 노숙인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숨졌다는 보고를 받고,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선 말했다. "연고도 없는 한 사람이 가는 길에 누군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다."  

라과디아만큼 시민들 사랑을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저 정도 시장이라면 약간 안심이 된다. 5세 정도는 아니니까! 친구가 되어주는 일. 가는 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5세 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노숙자들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죽지 않도록 지하철 화장실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 이 정도 발언이 나오지 않았을까.ㅋ

언어의 한계는, 곧 복지의 한계를 만든다. 또한 공동체의 한계를 조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아울러, 지금 세상에 있지도 않은 희망과 꿈을 관성처럼 들먹이는 기성 세대의 위로 타령은 좀 역겹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젊은 세대에 대한 사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이다. 젊은이들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 위로(타령)에 질식돼 죽을 것이다. 

현실을 말해야 한다. 희망 없음을 얘기해줘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아야 이 미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뻐꾸기처럼 날리는가 말이다. 역시 언어의 한계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싶은, 부끄럼쟁이 혹은 염치실종자들의 언어유희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 하찮은 위로에 침을 뱉아라.

니기미, 조까라 마이싱! 퉤!!

좋은 음식 니들만 처먹어대고, 미안하단 소리는커녕 거짓 위로만 지껄여대는 돼지들아,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벌금 얼마나 낼 테냐! 아니, 돼지들이 그것을 뱉아내도록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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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올해가 가기 전, 박래군 선생님을 뵀다. 소식이야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지만, 1년에 한 번이라도 눈 앞에서 알현해야, 뭔가 빠트리지 않고 한 해를 보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분 중의 한 분이다. 인권운동가다. 인권재단 사람의 상임이사.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다. 혼자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ㅋ)

그런 타이틀보다 래군 선생님의 학교 후배인 김별아 작가가 쓴 칼럼을 읽어도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김별아 작가 칼럼 중 하나. ☞ 래군이 형 / 김별아

중요한 건, 지금 래군 선생님은 인권센터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시다. '100일의 기적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인권센터 막바지 모금활동, ‘100일의 기적’ 프로젝트 돌입

나 같은 장삼이사가 할 수 있는 일. 기적의 저금통이다. 

동전을 모으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길에서 10원짜리라도 떨어져 있으면 낼름 줍는다. 인권센터에 보탬이라도 될까봐.ㅋ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으나, 모여도 아주 적은 금액이겠으나, 내 작고 사소한 저금통이 인권센터의 벽돌 한 장에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

인권센터 건립기금 모금에 관심이 있거나 주춧돌을 놓는데 동참하고 싶다면, 인권재단 사람의 홈피(www.hrfund.or.kr 혹은 www.hrcenter.or.kr)를 방문하면 된다. 인권센터 건립에 관한 자료와 모금관련 정보 등을 확인하실 수 있다.

어쨌든, 지난 4일 서대문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실, 텍스트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필자들과 래군 선생님이 함께 하셨다. 인권센터 관련 응원의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었으나, 수줍은 내 성격상 말씀을 결국 못 건넸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뵀으니 괜찮아!

아래는 그날을 기록한 기고 원문인데, 원고가 게재됐을 땐 앞 부분이 뭉텅 빠졌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게 그 부분인데, 어떤 이유에선지 빠졌다. 매문하는 입장에서 원고를 넘기면 편집권도 훌러덩 넘기는 지라, 항의 같은 건 않지만, 아쉽다. 왜 그 부분이 빠져야했는지 메일을 통해 한 줄 정도라도 알려주는 편집자의 센스가 없어서. 설마 정치적인 글이라고 오독해서 빠지진 않았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보랏빛 볼드체가 매체에서 훌러덩 삭제된 부분이다. 인권센터 건립이 잘 됐으면 좋겠다.

노동·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는 일!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김류미 박래군 손문상 조약골 한윤형


김진숙, 내려오다.
이 말은 아마 2011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쇳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을 위해 고공농성을 해야 했던 김진숙 위원이었다. 돈과 권력에, 1%에 일방적으로 밀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던 99%가 일군 아주 드물고 사소한 성공의 사례.

물론 이 사소한 성공을 위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힘과 비용을 쏟았는가. 가카 덕분에 모든 것이 암담한 시절, 5차례에 걸친 희망버스가 희망을 굴리고자 안간힘을 썼다. 물대포와 캡사이신이 희망을 저항했고, 사법처리 등의 협박이 난무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진중공업 해고자의 1년 내 복직 등을 뼈대로 하는 노사 잠정합의안이 마련됐고, 시민활동가 출신의 원순 씨가 서울시장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99%의 처지에 동감했다.

한진중공업 노조원의 한 아내는 이리 말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 문제를 사람들이 몰라줘 답답하고 힘들었을 때 희망버스가 찾아왔다. 희망버스 행사가 한두 번 열리고 끝나겠지 했는데,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응원을 해주니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맞다. 99%가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고 1%에 저항한 덕분이다.

지난 13일, 41주기를 맞이한 전태일 열사와 지난 9월3일 소천하신 이소선 어머니도 천국에서 미소를 지어주셨으리라. 그렇게 전태일을 떠올리는 시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소식이 퍼지고 김진숙 위원이 땅을 밟은 날, 쌍용자동차에선 19번째 죽음소식이 날아왔으니까. “해고가 살인”임을 알면서도 자본은 스스럼없이 살인을 자행한다.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제주, 그곳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담당하는 강정마을을 파괴하고자 하는 국가(군대)와 자본의 협잡과 침탈은 또 어떻고. 우리는 구럼비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99%의 일상을 흔들어놓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냥 놔둬도 좋을까. 희망버스가 향할 곳은 아직 많음을 보여준다. 사소한 성공을 이어야 할 이유까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 서울빌딩, ‘2011년 한국, 젊은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저항’이 울려 퍼졌다. 젊은이들은 어떻게 현실에 대응하는지, 저항은 어떻게 조직되는지, 우리가 삼아야 할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텍스트의 연작시리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의 필자, 김류미․조약골․한윤형과 박래군 인권운동가가 손문상 화백(프레시안)의 사회로 이야기를 풀었다.


박원순 후보의 압승으로 서울시장 선거가 끝났다. 어떤 변화를 목격하는 것 아닌가?

조약골(이하 골)
할 말이 별로 없다. 현재 나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있다. 마을 일이 바빠서 투표를 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는 선거를 안 한다고 생각하더라. (웃음) 아나키스트라고 모든 선거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편의상 날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나 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한윤형(이하 형) 이번 선거 핵심은 2002년 시작됐던 20~30대 연합이 참여정부를 지나면서 해체됐다가 안철수라는 키워드를 통해 다시 이뤄졌다. 세대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번 정권하에서 공통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SNS라는 매체를 통한 연합도 생각해볼 수 있을 테고. 안철수라는 아이콘이 세대를 통합하는데 어필한 것 같다.

김류미(이하 미) 희망청 활동가였으나 현재는 큰기업의 핵심부에 있다. 그 갭이 크고, 옮긴 것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에서 이번 선거가 가진 의미를 개인적으론 말하긴 어렵다. 물론 관심은 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박래군(이하 군) 앞으로 정치권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보는데, 아주 어렵게 상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으론 안철수, 박원순 같은 사람들이 보수정당을 하고 이에 맞서는 진보정당이 있어야 한다. 박원순 시장이 진보적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고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가 없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쪽도 낡은 틀에 있고, 그런 틀이 깨져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 시장은 오세훈 전 시장이 벌여놓은 부채문제 등을 정리하다가 임기가 다 끝날 것 같다. 특정세력이 부와 권력을 장악한 틀을 깨는데 얼마나 기여를 할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재벌과 맞설 수 있을까, 이런 부분. 앞으로 변화의 과정을 지켜봐야할 것 같다.

이번 선거도 20~30대 표심이 많이 좌우했다는 분석이 있는데, 어떻게 보나?

(형) 우리나라 정치담론에선 지지자가 있다면 새로 유입되는 사람이 더 큰 발언권을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오늘부터 정치가 중요하게 깨달았다는 얘길 하면 환호받는다. 정치세력을 대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새로운 사람을 요구한다. 정치인이나 정치적 지지자를 대할 때마다 리뉴얼하겠다는 욕망이 강하게 나타난다.

세대론 자체도 그런 욕망과 비슷하다. 정치를 일신하고 싶은데, 새로운 세력을 찾아내려 하고, 구별 짓기도 생긴다. 계속 리뉴얼을 요구하는 게 정치적으로 좋다고 얘기할 순 없다. 우리나라 정치도 새로운 인물만 유입되다보니 관료들에게 휘둘리기도 하고. 이 욕망을 조건으로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고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세대를 통해 정치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언론 보도에서도 이런 지적이 안 나오고 있다.

(미) 박원순 시장의 당선을 젊은 세대의 정치의식으로 분석하는 건 와 닿지 않는다. 결국 투표라는 것이 쿨 해보였던 것 같다. 연예인이 투표를 하니까, 박원순이 쿨 해보이고, 안철수는 워너비고. 그래서 이번 투표를 문화적 소비와 비슷하게 했단 생각이 든다. 정말, 정치적 주체로 참여해서 결과를 내놨느냐? 나는 회의적이다. 다음 선거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젊은이들의 지금 정치형태는 트렌드화 되어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이들의 정치의식이 실체는 없는 것 같다.

(군)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건 상대적이다. 아마도 80년대와 대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요즘 투표장에 가는 걸 보면 정치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지금이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잖나. 우리 때는 일자리에 대해 고민 안 했고, 낭만, 열정이 있고, 폼 나게 데모도 나가고. 싸워서 이긴 경험도 있고. 그러나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희망적일 것이다.


이번 선거에 SNS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즘 소통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골) 강정마을에서도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새로운 소통방식임에는 틀림없다. 잘 활용하면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매체 혹은 수단이다. 강정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이전과 약간 다른 분위기나 성향을 갖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거나 저항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새로운 흐름이 강정마을에서도 나타나고, 올 초부터 외부세력이 참여하면서 외연이 확장되고 많은 소식이 퍼져나갔다. 

(형) SNS와 관련, 말이 많이 나온다. 이전부터 뉴미디어 정체성을 갖고 얘기하는 게 반복돼 왔다. SNS 자체가 진보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등도 처음 수용될 때도 진보적인 공간이었다. 이후 평준화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트위터도 이전처럼 평준화 될 것으로 본다.

새로운 매체가 생겨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자본의 통제가 따라오는 것도 반복되지 않을까. 다만 강화되는 게 있다. 개인에게 수용되는 정보의 틀을 개인이 조절하는 추세다. SNS는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들 혹은 정보소스를 통해 정보를 유통하기 때문에 파편화되는 한편 예전과 달리 자신이 동의하거나 구미가 당기는 정보만 선택한다.

개인의 정보선택의 자율성이 높아지는 한편 그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사려 깊은 판단도 할 수 있지만, 구미에 맞는 정보만 확대재생산할 수도 있다. 그런 양날의 검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정보가 유통되고 공유될 수 있는 활동을 만들어야 한다.

(미) 나는 SNS에 깊이 관여한 경우다. 30대가 SNS를 많이 한다고 큰 범주에서 말하나, 대학생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 이력서나 스펙을 위해 SNS를 많이 하나, 그전까지는 별로 필요하지 않다.

아울러 네트워크를 통한 평판사회가 더 강화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가능한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일반적인 사람과 트위터에서 말을 섞다보면, 나의 견해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을 찾는 것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

(군) 나는 기성세댄데, 변화속도가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다. (웃음) 트위터는 안 하고 페이스북만 하고 있는데, 기존 언론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보다 각자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본에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이 나오고 지하철에서 책 보는 사람이 줄었다. 직접 대면해서 관계를 맺는 것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골) 강정마을 청년들은, 다 SNS를 한다. 조그만 마을이라 서로 매일 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SNS를 통해 확인한다. 직접 마주보고 소통하는 것보다 그 사람 근황 등을 살피고 소통할 수도 있다. 마을주민이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나온 경우가 있었는데, SNS를 하는 사람들은 이를 공유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 마을 주민들에게 트위터 사용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의미가 있고, 한진중공업 등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들을 수 있는데, 현장에 가지 못하나 같이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받을 수도 있다. 나도 소식을 올리면, 같이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잘 버텨달라고 응원을 많이 보내준다. 그런 것을 통해 나도 안도하고 응원을 보낸다. 그런 점이 좋다.


온라인상의 연대와 저항을 어떻게 보나?

(형) 처음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아이디를 썼다. 온라인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오프라인과 다른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군대를 갔다 오니 실명을 쓰더라. 매체가 바뀌면서 양상이 바뀌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게시판 문화에선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는 텍스트가 길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짧게 올리면서 구체적인 연대를 할 수 있는 활동이 각광을 받는다. 매체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미) 내가 설득하고 싶었던 친구는, SNS를 해보라고 했더니, 거기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더라.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도 정해져있다. 수용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 나는 RT를 하는 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론 다소 걱정된다.

(골) 참여는 넘치는 것 같다. 면죄부를 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정말로 강정마을에 오는 경우도 많이 봤다. 트위터를 보고 온 사람들 되게 많다.

(조약골에게) 아나키스트라고 스스로 규정했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불러줬는지?

(골) 19세기 아나키즘이 무장투쟁을 주창했고, 2차 대전이후 아나키즘은 비폭력 직접행동주의를 주창한다. 무장투쟁은 일부분이었다. 아나키즘은 여러 뿌리에서 발생한 것인데, 무장투쟁만 확대재생산 됐다. 그건 아나키즘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산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다.

운동으로서 직접 행동을 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주장을 한다. 직접 행동이라면 대의 정치를 통한 정치활동보다는 세상을 바꾸는데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선 내가 활동하는 방식과 비슷한 점도 있으나 나는 다양한 영향을 많이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른 운동이 엄숙주의적이고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 측면이 있는데, 내가 원해서 즐기면서 한 저항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인가 등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다보니까 지금처럼 살고 있다. 아나키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대추리, 용산, 두리반, 한진중공업, 강정마을 등으로 이어지는 인디문화, 비주류문화의 실체가 어떤 것이고 저항성은 어떤 것인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려 달라.

(골) 여러 측면이 있는데, 하나의 대안 공간을 만드는데 매력을 가지는 것 같다. 기존 사회와 다른 가치를 통해 운영을 해 가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경쟁보다는 사회적인 연대와 상호부조를 통해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전과는 다른 저항방식이다. 이전은 저항이 즐겁거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재밌고 신나지 않으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재미, 흥겨움으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를 나는 고민했고, 그 답으로 우리 스스로 대안 공간을 만들어냈다. 

저항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다. 글쓰기의 한계나 불편함 같은 건 없었나?

(형) 글쓰기가 사회운동의 참여 면에선 회의가 많은 작업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글쓰기는 우리사회 공동체의 원칙, 가치를 의견을 나누면서 정하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어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떠들거나 말거나 세상이 돌아가지 않나. 이를 테면 한국의 통치 자체가 담론적인 이데올로기로 지탱이 된다면 싸워볼 수 있으나, 보수는 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공격한다. 사회가 원칙이나 가치를 토론하는 장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회의는 트위터 100개를 쓰면 사람들 마음에 맞는 부위만, 구절로서만 소비한다. 그런 회의를 하면서 하는 작업이 글쓰기다.

68세대나 386세대는 자본이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시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더 엄혹하다. 우리가 사는 동안, 세상이 좋아지기보다 조금씩 더 가라앉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좌파는 국가나 자본가 계급을 욕한다. 그러나 국가나 자본가를 악마나 적대적인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몫이 나오고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투쟁도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글쓰기 등을 통해서 그런 것을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20대를 규정하는 많은 책이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나?

(형)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후, 그 규정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규정하는 것 자체가 싫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세대론은 책임론으로 흐르기 쉽다. 특정한 세대에 책임을 떠넘기는. 특정 세대를 지목해서 죄를 부여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방식이다. 세대론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군) 이른바 ‘386세대’는 굉장히 모순적이다. 진보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는 걸 보면 보수적이고 친자본적이다. 한때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만나면 증권, 골프, 교육 얘기를 하는데, 정치의식은 또 달랐다. 우리 세대가 자기들이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는데, 자기들의 경험이나 틀에서만 바라보니 젊은 세대와 맞질 않고 소통이 안 된다. 젊은이들이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나꼼수’에 열광하는 것이 젊은이의 저항의 실체일까?

(형) 한 번도 안 들어봤는데, 그건 나꼼수에 대한 열광보다 기존 제도가 약해져 있다고나 할까. 나꼼수의 역할이 있고, 기존 언론의 역할이 있는데, 기성의 텃세가 전혀 작동을 않는 거지. 나꼼수를 들어보질 못했으나, 나꼼수를 받아들이는 언론에 대해선 비판하고 싶다.

(군)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자기 방식대로 얘기하는 모범을 만든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도 유효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한편으론 아슬아슬하다. 쓰는 언어 등에선 마초적인 부분이 많다. 대신 욕을 해주는 거라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아무나 욕한다고 들어주는 것 아니지 않나. 이것도 유행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점령하라(Occupy)’ 등의 운동이 있다. 우리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변화의 조짐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혹은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군) 서구의 사회복지국가가 가능했던 건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우리는 다르다. 노동조합의 힘이 부족한 채로 사회복지 국가로 가자고 얘기한다. 갈 수도 있겠으나, ‘점령하라’가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것은, 과거부터 다져서 지금의 힘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나 흉내만 낸다. 혁명과 운동은 수출되는 것이 아니다.

‘점령하라’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의 본질을 공격하는데, 우리는 그 수위까지 올라가 있지 않다. 우리는 타깃을 어디에 맞춰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 번도 청산되지 않은 권력과 소수가 갖는 부를 어떻게 깨느냐가 중요하다. 1%만 누리고 있는 권력과 이익 구조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면, ‘점령하라’뿐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FTA(자유무역협정), 강정 싸움일 수 있다. 올 들어 곳곳에서 노동문제가 부각되고 있는데, 노동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이런 것이 긍정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골) ‘점령하라’가 한국 사회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있었던 게 2008년 촛불이다. ‘점령하라’는 리더가 없는 운동이다. 이게 중요하다.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1999년 시애틀에서 WTO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리더가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가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운동을 한다는데, 대중적인 저항운동을 끊임없이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궁금하다. 지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스스로 참여하고 도구를 이용하면서 저항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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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두근거린다. 오늘 서울시장 투표 결과가,

라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누군가는 서울시장이 되겠지. 살은 맑고 투명하며, 날렵하고 예쁜 외모를 하고 있으나 내장을 싸고 있는 배 안쪽은 시커멓고 쓴 학꽁치 같은 인간(일본에서는 음흉한 인간을 학꽁치에 비유한단다!)이거나, 민중보다는 시민 근간의 운동을 전개해 온 시민단체활동가 출신이거나.

아니, 그럼 뭐가 두근거리나!
행여 박원순을 만나도, 이리 두근거리진 않을 것이다.
타고난 DNA대로 예쁜 여자면 다 두근거리니, 예쁜 여자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 
예쁜 뇨자라도 용서가 안 되는 학꽁치 같은 인간도 있단다.

오늘 저녁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님을 만나뵙는다. 막걸리 한 사발도 함께다. :)
얼쑤~ 좋을시고. 캬~~~

사람을 만나는 일이, 늘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이라면 참 좋겠다.
만나고 나서 두근거림이 있어도 좋고. 

물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늘 두근두근 쿵쿵일 순 없다.  
아무 감흥도 없는, 즉 두근거림이 없는 만남은 괜한 에너지만 빼는 짓이다.

많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사람을 좋아한다고. 만남을 좋아한다고.
허나,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한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두근거림 없는 만남까지 좋아한다는 건, 글쎄. 1년에 한 번 만나도, 3년에 한 번 만나도, 어떤 만남은 늘 두근거림이다.  

어쨌든, 오늘 나는 두근거린다. 오늘, 만나러 갑니다~ 
투표결과보다 더 중요하고 두근거리는 만남이다. 

그런데, 황교익 선생님이 누구냐고?  
지난 19일, 황교익 선생님의 강연에 대한 나의 기록을 참조하시라.
원고 매수 제한으로 게재된 원고는 축약본인 셈이나, 아래는 원본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 글은, 먹는 것이 왜 정치이며, 투표가 중요한만큼 어떤 것을 어떻게 먹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록했다. 물론, 학꽁치 같은 여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복무하는 계급이라면, 이른바 '브랜드'여야만 상품을 믿도록 길들여진 인간에겐, 씨도 안 먹힐 내용이겠지만.

핵심은 이런 거다. 어렵지 않다. 내가 먹는 게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는 알자!
사실, 맛집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조미료로 인해 맛의 평등을 이룩한 마당에 맛집이 다 뭐란 말인가. 이 글은 어쩌면 맛을 잃어버린 도시에서, 삶의 미각에 묻은 씁쓸함을 다시게 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알아라. 사는데,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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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자본에 의해 조작된 먹거리에 오염돼 있지 않은가!
『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커피를 한창 배울 때, 의아했다. 왜, 맛없는 스타벅스와 커피빈을 사람들은 숭앙할까. 여전히 다양하고 옹골찬 커피에 매료되고, 그런 커피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이젠 조금 안다. 황교익 선생 식으로 말하면, 한국인은 “브랜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막 만든 두부가 맛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브랜드 찍힌 포장두부를 먹는다. 하루키 표현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를 하지 않고 두부를 먹는 셈인데, 황교익 선생은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한 브랜드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 포장두부 시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두부의 맛보다는 두부의 포장지에 찍힌 브랜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한국음식문화박물지』, p.202)

한 맥주CF 카피를 인용하자면, “커피 맛도 모르면서”, 많은 이들이 커피를 마신다. 실은 스타벅스를 마시고, 카페베네를 마신다. 혹자는 문화가 어쩌고저쩌고 할 것이다. 개뿔이다. 스타벅스의 참모습을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온다. 한 예를 들까? 스타벅스 공동설립자이자 회장인 하워드 슐츠는 이리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파트너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말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기업을 키워 내고 싶었다.”

우선, 파트너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를 보자. 해외의 경우인데, ‘스냅셔터’라는 암행 감시원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매장에 와서 본사 규칙대로 행하는지를 상부에 보고한다. 문제는 늘 바쁠 때만 오고, 꼴찌를 하면 구조조정 된다. 더 큰 문제는 스냅셔터 대부분이 지점 운영과 시스템을 모르는 대학생이다. 

또 스타벅스는 학생노동자 노동계약서의 주당 근무시간을 19.45시간으로 한다. 이유가 있다.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의무기준이 20시간이다. 15분이 모자란다. 꼼수 아닌가? 아울러 스타벅스는 정기적으로 각 지점에서 활동하는 노조원을 해고한다. 오죽했으면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회원들이 스타벅스 지점 앞에서 전단을 나눠 줬을까!

스타벅스, 공정무역 커피를 사용한다고 내세운다. 2008년 말, 스타벅스는 현재 5%에 달한 공정무역 커피 비율을 10%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2008년 스타벅스는 전체 매출의 0.02%를 커피 농민에게 기부했다. 이를 통해 얻은 홍보가치는 훨씬 높다. 마케팅의 승리다.

한국의 다른 브랜드 커피전문점이라고 다르진 않다. 얼마 전, 문제가 된 주휴수당(일주일에 6일을 근무하면 하루를 쉬더라도 휴무일 몫으로 지급해야 하는 수당)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주휴수당을 착복(!)하다가 고발, 조사 등이 이어지자 뒤늦게 이를 지급했다. 한국의 원두커피 시장을 주도한다는 브랜드 커피전문점들의 행태다. 당신이 지불한 커피 값, 커피생산자, 바리스타 등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는다. 대기업 자본의 주머니만 채운다. 커피의 눈물이다. 

물론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의무는 없다. 허나 이 말은 새겼으면 좋겠다. “먹는 것이 정치다.”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먹는 것에 왜 ‘정치’를 갖다 붙이나. 대형마트의 ‘통큰’시리즈가 있었다. 많은 소비자들이 값이 싸다는 현상에 집중했다. 이면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득을 주는 먹을거리에 탈정치적인 포장을 한다. “서민들이 먹기에 합리적으로 싸다”는 것이다. 싼값으로 만들기 위해 빠져나간 돈이 결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피땀임을 그들은 숨기고 있는 것이다.(『한국음식문화박물지』, pp.275~276)

지난 19일의 가을밤, 서울 홍대부근 가톨릭청년회관에서 『한국음식문화박물지』(따비 펴냄) 저자이자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수요악식세설이 열렸다. ‘한국음식문화, 한국인의 음식문화’를 주제로 한 강연. 우리는 제대로 먹고 있는가,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는 시간.

음식은 과연 문화인가


황 선생은 우리의 음식문화 판에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책을 계속 낼 계획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감각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강연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건넨다. 이 세상에 진리는 없다. 개개인마다 일리가 있을 뿐이다. 무리한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날의 얘기나 책도 일리로 알아줄 것을 먼저 당부한다. 

그는 ‘음식문화’에 대해 우선 언급한다. 많은 이들이 음식문화라고 하면, 조선 음식을 먹거나 이야기하고, 고급레스토랑에서 폼을 잡아야 문화행위를 하는 양, 인식한다. 그는 이것을 비판한다. “실제 우리 삶에서의 음식이 진짜 문화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말이 맞다고 말한다. “술자리에 3~4명이 앉아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라고 했을 때, 즉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제 처음 먹었고, 누구와, 누가 해 준, 어떤 기억이 있는지 물으면 근원에 있는 욕구 등이 드러난다. 자꾸 이야기하다보면 대부분 운다. 깊은 추억이 나온다. 애인, 남편, 아내에게 한 번 시도해봐라. 자기도 알지 못한 뭔가가 나온다.”

먹는 것을 보면, 출신지, 가족관계, 가정환경, 성격, 학력, 경제력 등이 나온다. 개인의 기호 안에 고유한 무엇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기호가 그런 것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개인의 기호가 뭉치면, 공통분모가 생긴다. 그것이 집단의 기호다.

“집단의 기호가 만들어지는 안에 음식습관․예절이 만들어진다. 이런 집단 기호에 경제사회적 요소 등이 영향을 미친다. 기호는 집안→문중→생활문화 공유지역→정치경제공유지역 등으로 확대될 것이다. 음식문화의 출발점은 개인의 기호인데, 문화라는 것이 따로 뭔가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서 비롯된다.”

헌데, ‘음식문화’라는 말을 꺼내면, 많은 이들이 전통음식부터 이야기한다. 문화의 전통이 먼 곳에서 내려왔고, 전통음식 안에 문화의 흐름이 있을 것이라고 상정한다는 거다. 황 선생은 10여 년 전 한복선 궁중요리연구가가 책을 내면서 했던 말(“아름다운 우리 음식은 점점 잊혀져가는 반면 뼈다귀해장국, 부대찌개, 쇠머리국밥 등 국적불명의 경박한 음식들이 우리 식탁을 대신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을 꺼내고 이리 덧붙인다.

“안타깝단 말이 측은하다는 뜻 같은데, 일상에서 흔히 먹는 음식을 경박하다고 붙일 정도로 궁중음식, 전통음식을 하는 사람이 우월하다는 듯 말하는 것은 화가 난다. 한식세계화도 이런 것과 같다. 문화부장관이 된장찌개를 호텔에서 팔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문화가 일반인들의 문화가 아닌 저 멀리에 있다고 상정한다.”

정부에서 만든 한식세계화 책(『아름다운 한국음식 100선』)을 보면, 표지에 신선로가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궁중음식이 전통이고 문화인 것처럼 말한다. 황 선생은 이를 비판한다.

“신선로나 부대찌개나 같다. 하나의 음식 형태를 놓고 전통이라고 할 수 없다. 신선로가 전통음식이라면, 신선로를 있게 한 집단이나 공동체, 사상 등 모든 게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한국음식에선 탕 문화가 전통의 하나인데, 부대찌개도 신선로와 같이 탕이다. 햄, 소시지 등의 외래 식재료가 들어왔지만 음식을 만드는 형태는 전통을 잇고 있다. 그래서 부대찌개는 전통음식, 흔히 먹는 전통음식이다. 국적불명, 아니다.”

문화란 대체로 소재의 유사성에 있다기보다 그 최종의 소비 양태에 따라 분화 또는 분류되는 것임을 이 부대찌개가 잘 보여 주고 있다.(p.189)

그는 외려 신선로가 국적불명이란다. 대만이 한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리플렛의 메인 사진으로 신선로를 쓰고, 인도네시아, 태국에도 신선로가 있다. 청나라 왕조도 신선로를 중요한 식기로 쓰는 등 중화문화권의 민족들은 신선로 문화권이다. 내용물은 차이가 있겠으나 신선로는 아시아의 그릇일 뿐, 한국의 그릇이나 한국의 음식이라고 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한국 외식업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조선시대엔 외식문화 자료가 없다. 왕가가 끊임없이 민중을 수탈한 역사였던 까닭에 민중이 문화를 만들 수가 없었다. 먹고 살기 바쁘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 가운데, 주막의 형태가 지금도 조금씩 남아 있다. 재래시장 국밥집에 가면, 주모가 있고, 손님이 오면 국밥을 넘기는 형태가 주막의 것과 비슷하다.

대한제국에 들어서 근대적 의미의 외식업이 형성됐다. 손탁호텔에 레스토랑이 생겼고, 화상이 인천에 음식점을 차렸다. 일제강점기에 외식산업에 대한 기본모양이 만들어졌다. 한정식, 백반, 선술집 등 지금 볼 수 있는, 일본과 우리 것이 결합한 외식업 형태가 나타났다.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한 외식업 형태가 깨지고,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 특히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생계형 외식업(좌판, 행상)이 생겼다. 경제개발과 함께 한 이농현상으로 도시에서 외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도시노동자의 ‘밥집’이 번성했고, 집에서 먹는 음식을 외식으로 파는 백반도 이때 등장했다. 

“한국 외식업체의 독특한 호칭인 이모, 고모가 있다. 주인은 손님에게 아들, 조카 대하듯 욕도 하고 살갑다. 그런 독특한 문화는 상품을 팔기보다 집에서 먹던 것을 내놓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타향살이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먹인다는 생각이었던 거지.”

음식이 집안의 음식이니 식당의 아주머니들도 손님을 가족 맞듯이 하였다. 손님들도 대부분 고향을 떠난 노동자여서 백반을 자신의 집안음식처럼 여겼고, 그 음식을 내는 아주머니들을 어머니, 할머니, 이모처럼 여겼다.(p.27)

그런데 이것이 외식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였다고 황 선생은 지적했다. 서비스 정신이 없었고, 받은 돈에 대해 음식의 맛과 질을 보장하지 않고 대충했던 것이다. 그러다 1980년대 들면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1979년 서울 소공동에 생긴 롯데리아. 패스트푸드가 처음 들어섰고, 자본 중심의 음식점 형태가 나타났다. 

영양, 전통, 향수의 소비 시대

황 선생은 국내 외식업계의 열쇳말로 영양, 전통, 향수를 들었다. 우선 영양. 햄버거는 1970년대 정부에서 권장한 영양건강식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 햄버거는 정크푸드가 됐다.

“식품영양학계가 똑같은 음식을 두고 달리 말했다. 식품영양학자 말은 믿으면 안 된다. (웃음) 영혼이 없는 학자들이다. TV에서 브로콜리가 건강에 좋다하면 다음날 브로콜리가 동난다. 영양에 이렇게 집착하는 민족이 없다. 몸에 아무리 좋아도 수분이 90% 넘는다. 몇 가지 영양이 골고루 들어가 있는 음식을 먹는 게 맞지, 하나만 그리 먹는 건 아니다.”

전통에 대해선, 한정식을 들었다. “한정식의 상차림 기본은 다 못 먹게 하는것이다. (웃음) 태생이 요정 음식이다. 접대의 음식이다. 당신을 위해 음식을 허비할 정도로 신경 썼소, 하는 거다. 솔직히 한정식은 미개한 것이다. 전통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맛있게 음식을 못 먹게 한 것도 많다. 이것을 쥐고 있으면 안 된다. 한정식, 없애야 한다.”

향수는 1981년 국풍행사를 들었다. 광주를 잊게 하려고 전두환이 행했던 쇼. “전국 향토음식이 대거 올라왔다. 타이밍이 적절했다. 60~70년대 서울 와서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이 고향음식에 향수를 느낄 때였다. 지역 음식과 풍물을 통해 애향심을 자극했다. 전두환의 기획만 아니었다면 이런 행사는 자주 하는 게 좋다. 향수에 대한 소비가 80년대 만들어진다.”

황 선생은 이 세 요소의 조작 가능성을 들었다. 식품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양, 구분도 안 되는 음식에 붙이는 전통, 지자체 혹은 업자의 마케팅 차원의 향토음식. “실체를 알고 먹는가, 모르고 먹는가는 큰 차이가 있다. 누군가 조작한 것을 먹는 건, 온전하게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생얼로 보자는 것이고, 책을 쓴 이유다.”

자본의 조작, 정치와의 결합

가장 심한 조작의 실체로 든 것이 자본이다. 자고로, 식품은 맛있고,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마케팅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포장만 그런 경우, 대다수다. 대부분 대기업의 식품이 그렇다고 황 선생은 주장한다.

풀무원을 예로 든다. 자연, 위생, 건강, 환경, 유기농 등 풀무원을 둘러싼 이미지다. 창업자인 고 원경선 이사장의 이미지도 이에 거든다.

“원경선 이사장을 존경하나, 풀무원은 그 존경심과 관계없이 원경선 이사장을 이용한 나쁜 집단이다. 풀무원 매출액의 절반이 두부인데, 그 두부가 한국의 식탁에서 가장 나쁜 음식을 만든 원흉중 하나다. 두부는 금방 만든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풀무원이 딴죽을 걸었다. 80년대 중반 보름 정도 유통기한을 지닌 포장두부를 만들어 전국에 유통했다.”

플라스틱 용기에 물과 함께 담겨 있는 두부를 먹는다.… 하루키 식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를 하지 않고 두부를 먹는 것이다.(p.201)

두부에 더운물에 넣으면 맛이 간다. 그런데도 고소한 맛이 나는 이유는, 해바라기씨유 때문이다. 포장두부의 고소함은 해바라기씨유의 것이다. 두부의 고소함이 아니다. 황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가짜 맛 두부다. 문제는 또 있다.

“풀무원이 자기 공장에서만 생산하면 봐주겠다. 그러나 2개를 제하고 스물 몇 개 하청기업이 만든다. 그래서 전국에 뿌릴 수 있다. 대기업이 가진 전형적인 형태다. 소규모 두부공장을 다 죽이면서, 건강, 환경 등을 이야기한다. 소비자가 맛있는 두부를 먹을 권리도 다 죽이고. 좋은 이미지를 지닌 업체조차도 이런 조작을 한다. 원경선 이사장의 원래 뜻과도 멀다.”

김치의 경우다. 일본 사람은 ‘김치’라고 읽지 못한다. 기무치다. 그러나 한국인은 김치라고 읽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반대의 경우다. 일본의 다쿠앙은 무를 말려서 절인다. 한국의 단무지는 생무를 사용해서 다르다. 일본 사람들은 그러나 단무지를 보고, 시비 안 건다.

“음식문화는 이동․전파하면서 먹는 사람이 제멋대로 부르고 먹으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김치’로 읽으라고 강요한다. 일본 사람들 따라할까? 따라할 일 없다. 그러면 얻는 것은 뭘까? 애국심 마케팅은 한국 식품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난다. 어디에 뭔가를 수출했다고 애국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걸 긍정하지 않으면 매국노 취급당하는 분위기다. 자본이 건드리는 부분이 건강, 애국 등이다. 속을 보면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어내려고 이렇게 이용한다.”

김치에 대한 이 민족적 자부심은 권력자들이 정치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조성한 측면이 다분히 있는데, 여기에 대해 한국인이 큰 반감을 가지지 않는 것은 김치로라도 세계에서 주목받고자 하는 민족적 열등감이 일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136)

이 조작의 카르텔에 정치도 빠질 순 없다. 정부가 자본 대신 마케팅을 해 주는 경우다. 정부 예산으로 전시회를 열어주고 쇼도 해준다. 황 선생이 든 예는 서울떡볶이페스티벌이다. 떡볶이연구소가 차려졌고, 첫해였던 2009년, 7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됐다.

“떡볶이 세계화는 일반인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맵고 짜고 단 고추장떡볶이를 먹는다. 그런데 떡볶이연구소는 정부 돈으로 뭔가 열심히 한다. (웃음) 한식세계화를 한다고 모인 위원회 면면을 보면 다 프랜차이즈 사장들이다. 외국에 점포 세웠다고 치킨 프랜차이즈 사장도 들어가 있다. 정부가 한식세계화와 관련된 업체를 지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인은 여전히 고추장떡볶이를 열심히 먹고 있으며, 또 누군가 떡볶이 세계화를 외치면 환호할 것이다. 한국인은 자신이 즐겨 먹는 음식을 직시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p.172)

먹는 것이 정치인 이유다. 자본과 정치는 끊임없이 야합하고 결탁하면서, 먹거리(의 유통과 소비)를 조작한다. 이런 신성동맹 구조는 어떤 현상을 낳을까. 황 선생 왈. 자본들이 끝없이 식당을 운영․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은 혀를 놀려 소비자들을 낚고 주머니를 채운다. 

“한 달에 한 번 식품대기업 CEO들이 모여 조찬을 한다. 무슨 얘기를 하냐. 먹는 식초 만들었던데, 우리 같이 개발하자, 이런다. 경쟁하는 것 같지만, 한 통속이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구조다. 중소업체, 절대 못 들어간다. 밀다원이라는 우리밀 전문기업이 시장을 넓혀나가다가 메이저 6개의 협공과 견제에 부도났다. 결국 제분공장은 삼립으로 넘어갔다.”

황 선생은 한탄한다. 소규모로 정직하게 뭔가를 하려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가령, 지금 대기업만 하는 식용유도, 좋은 기술을 지닌 소규모 회사들이 있으나 그들은 시장에 진입 못하고 있단다. 소비자들은 좋은 식용유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자본에 의해 뺏기고 있다.

“한식세계화도 대기업 식품회사 지원책이다. 일반과 아무 관계없다. 일반식당 음식의 질 개선에 대한 예산은 하나도 없다. 우리 일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정부에선 할 생각이 없다.” 지금-여기의 우리에겐 국가가, 정부가 없음을 먹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이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가 정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한국인은 먹는 것이 정치적인 일과 관련이 없는 듯이 여긴다. 심지어 음식을 먹는 데 골치 아픈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 한다.(p.274)

한국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


황 선생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정치’로 한 것은 이런 이유다. 우리가 먹는 것이 자본과 정치에 의해 조작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것을 벗어나게 하려면?

“지금과 같은 정부의 행태는 아니다. 투표할 때 잘해야 한다. (웃음) 개인의 것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큰 구조에서 자본과 정부가 결탁해 잘못된 인식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 들리는 이야기만 듣고 흘러가면 똑같이 흘러간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뭘 먹고 살지? 하는 것. 내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먹을거리에 대한 당신의 작은 선택이 땅을 사랑하고 축복된 가족의 행복과 연결되고 지역의 진실한 농가와 식품기업을 응원하고 건강한 아이들, 활력 있는 사회실현에 연결됩니다.(『잘 먹겠습니다』, p.93)

그는 취재를 갈 때, 위성사진으로 산, 계곡, 들을 먼저 본다. 자연환경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위성사진을 통해 땅이 갖는 생태적 조건이 보이고, 그곳 농산물이 어떤지 감이 잡힌다.

“맛있는 농산물이 나고, 재배가 잘 되는 지역의 공통점이 있다. 북으로는 산이 싸고, 남으로는 강이 나 있는 곳. 먹는 것이 자연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땅을 다시 봐야 한다. 내가 먹는 게 어디서 온 것인가 알면, 자연이 어떻게 나에게 오는지 느낌을 가지게 되는 날이 온다.”

음식은 자연에서 온다. 흙과 물에서 자라는 식물과, 그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 또 그 동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 인간이 먹는 음식의 재료이다. 따라서 모든 음식은 그 음식을 만들고 먹는 지역의 자연을 담고 있다.(p.12)

물론, 그 느낌은 현장에 자주 가봐야만 느낄 수 있단다. 그렇게 가다보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가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황 선생의 조언이다. 먹거리를 통한 존재의 확인.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황 선생(의 말씀)을 감히 지지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생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들 거라고 믿는다. 그것은 가깝게는 좀 더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들고, 멀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최근 이춘호 영남일보 기자는 ‘맛집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맛집 소개 코너를 접었다. 대기업이 반제품형 먹거리를 지천으로 토해내고, 반제품 식재료는 조미료에 범벅된 현실. 숱한 파워블로거가 맛도 모르면서 맛집 운운하고, 각종 가이드북과 포털은 맛집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맛의 평등이 이뤄졌다. 맛집 천국이다. 주방의 찬모들은 기자에게 이리 말한단다. “이렇게 화학조미료를 퍼붓는데 손님이 몰려드는 걸 이해가 안 되네. 참 이상하지.”

맛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탓이다. <트루맛쇼>가 지적했듯, 자본이 장악한 미디어에 속고, 화학조미료가 지배하는 음식에 길들여졌다. 이 기자는 “동태, 황태, 북어, 삼계탕, 대구탕, 복어탕, 추어탕의 국물맛이 동일해진 슬픈 세상이 도래했다”고 한탄했다. 그는 “감칠맛은 ‘자연의 맛’이 아니다.… 이제 그만 맛있는 식당을 예찬하자. 맛있는 식당은 얼마든지 조작을 통해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요리는 마음이, 정성이 양념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도시화를 이루면서 저급한 음식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한국인들이 그 재료의 맛을 숨겨 먹을 만하게 조리하기 위하여 고춧가루를 과다하게 사용한 것은 아닌가 추론할 수도 있다. 고춧가루에 설탕, 소금 이 셋만으로도 웬만한 음식은 먹을 만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p.139)

양심적이고 우직한 식당과 함께 개개인의 각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다짐하는 개인들 말이다. ‘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이제부터 먹을거리를 진지하게 선택하겠습니다.’(『잘 먹겠습니다』, p.100) 다시 되새김질한다. 먹는다는 건,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참 고맙고 미안한 일이다. 먹는다는 건. 

먹는다는 것에 대해 묻고, 듣다(Q&A) 

개인이 각성해야 한다고 했다. 오염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은 생협을 이용한다. 나는 되도록 동네 두부집을 가고, 두유를 산다. 동네를 뒤지면 두부를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 있다. 대기업 두부와 동네 두부는 똑같다. 위생이 조금 다를 순 있어도. 작은 곳이라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고 자본의 의해 기획되는 먹을거리를 거부하는 소비자도 있다. 이런 소비자는 자신이 먹을 음식이 누구에 의해 생산이 되고 어디에서 왔는지 따진다. 자신이 지불하는 돈이 그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잘 전달되는지도 알아본다. 공정무역이니 공정거래니 하는 먹을거리 유통 형태가 이런 것이다.(p.275)

한국음식이 더 달달해진다. 문화적인 현상인가? 자본의 조작인가?

입맛이 대개 달고, 맵고, 짜고 세 개인데, 원재료 맛을 속이는 방법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 적당히 달고, 맵고, 짜면 재료에 관계없이 먹을 만하다. 이젠 별 생각이 없어진 거다. 소비자의 잘못이다. 나도 외식하는 것 너무 싫다. 너무 달고 짜고. 일반인 미각이 오염돼 있다. 드러내야 한다.

소비자의 잘못된 미각이 첫째라면, 둘째, 외식업체들이 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 좋은 식재료를 써도 맛없다는 소릴 들을 수 있고, 그렇게 망해나간 집도 많다. 내가 맛있다고 해도 망한 집 많다. (웃음) 화학조미료도 없고, 단맛, 짠맛이 약해서 뭐 이러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정직한 음식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잘 안 갈 수 있다. 소비자 각각이 그걸 알고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단맛에 중독돼 있음을 주변에 얘기해야 한다.

최근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많다. 대기업도 진출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대기업에 몰아주기 하는 거다. 지방에 가면 국순당과 국순당 계열 막걸 리가 다 깔렸다. 지역 막걸리를 다 죽이고 있다.

몇몇 통합된 브랜드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나쁜 거다. 대자본이 만든 것과 지역에서 만든 막걸리가 차별화돼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제조방법의 차이가 없다. 맛 분별력도 없고. 지역 막걸리를 보호하자는 여론이 만들어지려면 특색 있는 막걸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애매하다.

대자본의 막걸리 사업은 좋지 않다. 두부와 같다. 대한민국엔 두부공장이 1500여개다. 일본은 동경도에만 2천개고, 커버하는 브랜드도 없다. 1~2명이 두부공장을 운영하는 곳도 많다. 그런 곳이 15%를 점유한다. 일본과 우리에게 두부는 같은 음식인데, 산업에선 그런 큰 차가 있다. 일본은 지역에서 하는 건 대기업이 못하게 방어막이 있다. 한국도 그리 해야 한다.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문제가 비정치적인 일인 듯이 여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201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재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강자로 군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p.275)

식물성 식용유가 돼지기름보다 나을 게 없지 않나? 돼지기름 나쁘다고 없앤 건, 식용유 회사가 조작한 건가?

돼지기름처럼 맛있는 기름이 없다. 예전 중국음식엔 돼지기름을 썼는데, 지금 다 없앴다. 동물성기름이 나쁘다고 주입시켰다. 식용유 회사들이 식품영양학자와 짜고 한 짓이다. 기름도 대기업에서 만든 가공의 것을 먹어야 몸에 좋고 위생적인 것처럼 만들었다.

삼양사가 공업용 우지로 망했다. 그 보도를 한 사람은 사과해야 한다. 공업용 우지는 아무 해가 없다. 그 사건으로 공업용 우지, 동물성기름이 나쁘다고 퍼졌고, 더 나쁘고 맛없는 팜유가 판을 쳤다. 팜유 라면이 지금도 있다. 언론도 문제고, 제대로 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소비자가 판단하기에 너무 힘들다.

최근 천일염 농약 사건과 관련해서도 정부가 장난쳤다. 그건 맹독성 농약 천일염이다. 정부는 그 일대 천일염을 차단시켜 전수조사 해야 한다. 그게 할 일인데, 속인다. 왜냐. 천일염은 정부 주도의, 전라도에 혜택을 주려고 만든 유일한 산업이라 정치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한국에서는 음식을 두고 여러 정치적 활동이 벌어지는데, 천일염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p.141) 

식품에서 가장 큰 적이, 지금은 정부와 자본이다. 두 개는 결탁돼 있다. 한국에서 식품은 미각 행복도가 높아질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식재료를 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몇몇 대기업이 쥐고 있어서다. 대기업이 식품을 주도하니, 먹는다는 것의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

한국 사회는 거대 자본이 시장을 완전히 잠식하여 영화관에서 먹는 음식 하나에까지 이것 먹어라 저것 먹지 마라 하고 간섭을 한다. 영화관이란 겉은 세련된 문화의 공간이지만 그 안은 영악한 속물들이 소비자의 주머리를 강탈하기 위해 꾸며 놓은 공간이다. 팝콘이 표상하는 세련된 미국적 삶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p.261)


음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먹는 게 나다’, 라고 하고 싶었다. 근대 이전, ‘밥이 하늘’이라는 해월 선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밥 한 그릇에 천지인이 다 있다는. 지금 우리는 만들어지고 가공된 음식을 먹는다. 생산지와 떨어진 삶에서, 음식이라는 것이 뭔가 정리를 해보니, 내가 먹는 게 나다, 좋고 바른 것을 먹으면 좋고 바른 내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뭘 할 것이냐? 이런 갑갑한 현실에선 정책 입안자나 그런 자리를 쑤실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작정한 게 4~5년 흘렀다. 블로그도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가 강하다. 그래서 바꿔보고 싶다. 최종 목적은 식품의 생산수급 시스템을 바꾸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식품과 관련한 좋은 생각, 좋은 먹을거리를 먹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곳에서 아이디어 내면서 일 하고 싶다.

음식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어떤 글쓰기든 기본은 같다고 본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글을 잘 쓴다는 소릴 들었는데, 처음 회사에 들어갔는데, 글에 빨간 펜이 좍좍 그어진 거다. 충격을 받고, 고등학교 문법책을 샀다. 너무 어렵더라. 다시 중학교 문법책을 사서 읽었더니 사흘 만에 이해가 되고 고등학교 문법책을 다시 보니 석 달 걸리더라. 이후 국어교과서를 꼼꼼하게 봤다.

그 후 온통 세상에 비문만 보이는데,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웃음) 문장을 쓰는데, 이게 비문이 아닐까, 걱정돼서 밤을 꼬박 새고, 파지는 쌓이고. 3년 정도 하니까, 내가 쓰는 문장이 비문인가, 문법에 맞는가를 의식 안 하게 됐다. 어느 순간, 와 있더라.

문장에 대한 기본기가 제일 첫째다. 그런 뒤, 관련되는 잡다한 지식을 섭렵해야 한다.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한다. 잡학이어야 한다. 기자는 아는 척 하는 직업이다. 칼럼니스트도 그렇다. 저널리스트의 기본자세다. 모르면 전문가를 찾고. 어떤 분야의 글이든, 기본은 가지고 해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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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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