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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내가 들고 가는 저것은 무엇이었을까.

몽유(夢遊)라도 한 기분.
안빈낙도()를 꿈꾸었을지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

내 가난한 영혼을 들고 가던 것은 아녔을까.
내 영혼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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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정은임, 정든님이여.

지금, 입을 봉쇄당하고,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우리.
그래서, 당신이 더욱 그립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다시 여름이며, 다시 8월4일이 옵니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정영음을 추억하는,
그의 목소리에 교감하고 그의 마음에 공명했던,
당신의 작고 사소한 참여를 기다립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우리입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당신의 작은 참여, 기다립니다. ^^
 
은임 누나는,
제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누나이기에, 일년에 한 번이지만,
나는 그 하루를 누나를 그리워하면서 보냅니다.

www.worldost.com


 지금, 말 못하는 우리는 정은임이 그립습니다
8월4일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 제6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개최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것을 영화로 풀어내며 음악을 들려주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 그 어느 날 새벽, 100여일을 고공 트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던 그 목소리.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는다며,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말하던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준 사람이다.

그 사람, 정은임 아나운서다. 말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지금, 그 사람의 당당하면서도 따듯한 한 마디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없다. 지난 6년여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가 열린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팬들이 다음달 4일(화),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에서 제6회 추모바자회를 연다. 8월4일은 정 아나운서의 기일로,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는 행사다. 매년 기일에 맞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과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카페 티모르(www.cafetimor.com)도 커피 등을 통해 행사에 참여한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으며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영상회를 가져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다.

추모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가게 대표번호(1577-1113)로 전화하면 무료택배(기증량 1~2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낼 경우,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02-765-6004)으로 보내면 된다. 단, 보낼 때 [정은임 아나운서 동숭동헌책방 행사물품]이라고 써야 한다. 기증방법이나 기증받지 못하는 품목 등에 대해서는 관련사이트(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를 참조하면 된다.

추모바자회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정대철 씨는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로 올해도 기일에 맞춰 추모바자회를 열게 됐다”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음은 6주기 추모행사 내용이다.

1. 행사일 : 2010년 8월4일 수요일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약도 :
http://www.beautifulstore.org/AgaOrg/GetInfo.aspx?SerialNo=1000000134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 사업회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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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여름이.
물론, 기대하듯(으응? 누가?) 녀자 이름, 아니다. ㅠ.ㅠ

말 그대로 이 후끈후끈 계절, 여름.
나, 녀름이 확실히 오면 심장이 둑흔둑흔.
 
왜냐고. 하악하악.
내가 뭐라카면, 보나마나 뵨태 취급할테니,
김훈 작가가 여름을 찬미한 글에 살짝 기대리라.
(뭐, 그래도 내게 돌아올 화살은 똑같이 뵨태겠다만!)

역시, 녀름은 노출하고 볼 일. (나의 노출은 민폐임을 알지만!)
아, 알흠다워라. 녀름. 난, 녀름 없는 곳에선 못 살아!
내 눈이 호강하고, 마음이 므흣하고, 심장이 하악하악.
(침은 질질 안 흘리니까, 꺽정 마!)

말하자면,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
초큼 오버한다 싶은 것(나라의 미래, 나라의 힘, 겨레의 기쁨 등)도 있지만,
그 정도는 뭐, 애교로! ㅎㅎ

출처 : 씨네21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지 몸을 보고 있는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 혼란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이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의, 그나마 즐거움이다...(중략)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티,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서 나는 흔히 아득함을 느낀다...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다들 예쁘고 다들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다.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전문을 보고 싶다면, 여기 클릭질)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노출

여담인데,
SBS(라고 쓰고, 시방새라고 읽는다)는, 꼴통쉐이답게,
성폭행 관련 기사를 보도하면서, 미니스커트 영상을 배치함으로써, 
지네들 수준이나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명백히 보여줬는데, 
저리 근엄하시고 엄숙하셔서들, 이 녀름 참느라 얼매나 허벅지가 아플까나.
시방새, 지들의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선 귀 없는 척 하면서, 고매한 척 하긴. 

김훈 작가의 말을 다시 빌자면, 이 말을.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려버두라는 말이다."

내 말이. 쫌! 내비두라. 상관도 없는 것, 엉뚱하게 배치시키지 말고.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보는 <하하하>. (으응? 뭥미?)

아참, 여름엔, 나는 이 노래가 쵝오. 여름이야기(무한궤도).
물론 옛 동네를 걸어도, 만날 첫 사랑이 없는 게 아숩긴 해도.
아, 옛날에 이 노랠 불러주면 참 좋아하던 그 사람, 떠오른다.
여름아, 잘 있는 거지? ^.^

더위도 괜찮아! 녀름아, 살앙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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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다윈, 하면 자동조합 되는 것들.
즉, 창조론을 누른 진화론이 생각나고,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That's It.

더 이상 알 것도, 더 캐물어야 할 것도 없고, 
더 알고 싶단 지적호기심도 이끌지 못했다. 
제도권교육내, 가장 보통의 학생이었던 내게,
다윈은, 『종의 기원』은 그랬다. 
그냥, 그게 다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더랬다.

다윈, 종의 기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짜로 알고 있을까.
그러니, 뒷통수를 강하게 후려친 강연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진짜 앎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얼굴 빨개진. 
따지자면, 선생들도 몰랐고 내 책임도 아니지만, 나는 왜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부끄러움. 

진화론은, 단순히 인류가 원숭이와 같은 조상에서 형성됐음을 알려주는 이론이 아니며,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은, 다윈의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한 말을 다윈의 말로 와전했을 뿐. 
그래서 약자의 도태 혹은 소멸을 당연한 것으로 보기 위한 근거로 악용됐을 뿐.

'다윈주의'를 적자생존의 법칙쯤으로 오도했다면,
다윈 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꾸벅할 일이다. 나도 미안해요, 다윈 할아버지. ^^;

박성관.
다윈에 미쳤다는, 그래서 다윈 할아버지와 연애질을 계속 하겠다는 학자.
지난 다윈에 대한 앎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던, 지난 5월 그의 강연이었다.

크게 봤을 때, 다윈의 '사상'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 놓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결코 특별하게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자 모든 가치의 척도가 아니다!
그놈의 인간중심주의, 휴지통에 처박아라.
그래서 다윈은 현재진행형의 '혁명'.

빙고. 인간중심적 사고.
좀 불편한 감도 있었는데,
다윈이, 나와 생일이 같은, 다윈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그리 주장해주셨다니. 꾸벅.

이제 남은 건, 9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잘 소화하는 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사고를 몰아냈으니,
가장 보통의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세계를 좀더 넓게 바라보고 움직이는 일.

다윈, 
제대로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어쩌면 당신의 일상과 세계, 사고와 행동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임팩트를 가할지도.

물론, 이 책이 다윈의 모든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생각은 없으니, 
또 다른 다윈이 있으면 알려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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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종의 기원』을 제대로 알면 근사한 세계가 펼쳐진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박성관과의 만남


어쩌다 생일이 같았을 뿐이었다. 어떤 연관성이나 필연 따윈 없다. 그럼에도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단지 위인들과 생일이 같다는 것도 사소한 위안이 된다.

별 볼 일 없는 가장 보통의 남자인 내게도 그렇다. 다윈, 링컨, 예니(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와 나는 생일이 같다. 더구나 그들은 의도야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진화시킨 해방의 파수꾼들 아닌가. 나도 뭔가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봤자, 내 몸과 마음을 세상의 흉포한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밖에 더하겠느냐마는,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뿌듯한 일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방시켰느냐.

내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을 들이대자면,
다윈은 창조론에 포박된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념에서 인류를 해방시켰으며, 
링컨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을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예니는 남편인 카를을 도와 계급적 사유에 익숙하지 못한 인류의 사고를 해방시켰다.
직간접적으로 나는 그 해방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2009년. 다윈과 링컨은 탄생 200주년이라고 떠들썩했다. 1809년 2월12일, 한날 태어난 두 사람. 우리나라에선 그들의 위상이 영미 같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 등을 통해 상당히 나왔다. 특히, 다윈은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과 맞물려 책이 지닌 의미와 위상 등도 많이 언급됐다.

하지만, 많은 우리는 『종의 기원』을 들출 생각까진 않는다. 숱한 경로를 통해 『종의 기원』이 진화론 주창서라고 알고 있고, 진화론이 대세인 마당에 굳이 책까지 들춰볼 엄두, 낼 턱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오류. 보지도 않았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제로 읽어보면 문장은 평이하기 이를 데 없고, 게다가 난해한 구절도 없으며, 심지어 무슨 전문 용어들로 범벅인 책도 아니다. 문장이 좀 길다는 점을 빼고는 고전 중에서도 가장 쉬운 책 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종의 기원』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 과학이 다 증명해 놓은 이론을 구태여 150년 전의 책까지 먼지 털어 가며 읽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p.11)

그러니, 이 말이 솔깃할 수 있겠다. “다윈의 현재성과 불온성을 되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과 『종의 기원』의 다윈이 어떻게 다른가? 창조론과 자신이 살던 시대의 진화론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다윈의 참모습을 통해 새로운 자연학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다윈과 사랑에 빠진 인문학 연구자 박성관과 함께 읽는 다윈의 『종의 기원』.”

호기심 작렬이다. 나와 생일이 같은 다윈, 제대로 알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녀왔다. 지난 5월27일 서울 동교동 그린비출판사를 찾았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박성관 지음|그린비 펴냄) 출간기념 저자 특강이 있던 자리. 박성관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다윈. 다윈 그리고 『종의 기원』, 널 다시 보게 됐어. 물론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하기엔 한참 미약하지만, 기존의 관념을 깨부쉈던 박성관의 특강. 이 또한 흥미진진하지 않았겠는가. 다윈, 누구냐, 넌. 『종의 기원』, 어떤 책이냐, 넌. 


다윈 가라사대. “바보들을 빼면 인간의 지능은 별 차이가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나 당신이나 바보가 아니라면, 다윈과 우리, 지능 차이 별로 없는 인간일 테니, 어려워 마시라. 박성관 가라사대. “다윈은 150년 전, 온 몸으로 하는 생각을 해보자고 제안한 거다.”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이렷다. 당신도 할 수 있고 생일이 같은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날의 특강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종의 기원』, 리라이팅의 이유

우선, 『종의 기원』. 1859년 11월 첫 출간된 원서는 499쪽(요즘 판형으로는 800~900페이지)에 이른단다. 1250부를 찍었는데, 2백 몇 부를 다윈이 샀단다. 땅 투기도 하던 부자 다윈이었다. “다윈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도 꼽힐 거다. 정말로 친절하고 온화하다.”

『종의 기원』은 다윈 생전 6판까지 찍었다.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 개정판을 냈다. 유럽을 점령한 다윈이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져 나온 탓이란다. 당대 생판 ‘듣보잡’이었던 자연선택설에 대한 연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 된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1판에서 6판까지 차이가 무려, 76%. 박성관 왈, “이게 차이냐. 다른 책이지. (웃음)”

다윈,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 엄청 많다. 그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생 건강이 나빠 하루 2~3시간밖에 활동할 짬이 없었다는 것. 그런 책 20권을 냈다는 것. 놀랍다. 더 놀라운 것 알려줄까? 그냥 책도 아니요, 모두 연구서란다. 그걸 2판, 3판... 6판까지 냈다니. 미친 것 아냐?

“그런 책들을 쓴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교양으로서 다윈을 아는 것은 삶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다. 무의미하다. 우리의 생각 전체를 바꾸려 한 건데, 실제로 많이 바꿨다. 그런데 그것을 근대인들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꿨다. 작년이 탄생 200주년이었는데, 여러분 삶에 변화가 있었나? 딱 하나,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데... (웃음) 이런 건, 살아있는 고전이 아니다. 표창처럼 가슴에 와서 물음표나 느낌표가 박혀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건데, 작년에 아무 것도 없었잖나. 살아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다윈을 살리려고 이 책을 썼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은 그런 책이란다. 기존의 것을 반대로 뒤집는. 그는 자신한다. “지금의 자연과학 기준으로 하면,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연과학, 세계를 바꾸려고 이 책을 썼다. 진짜다. 수사가 아니고. 나를 바꾸고 여러분을 바꾸고,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해. 나는 다윈을 통해 한 세상을 봤다.”

박성관의 리라이팅이 의도한 바는 ‘공생’이다. 『피터 래빗 이야기』의 저자 비아트릭스 포터에 대한 이야기가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에 나온다. 화가이지 생물학자인 포터의 그림은 얼핏 보면, 지저분하단다. 뿌연 이끼 등이 있어서.

그러나 핵심은 뿌옇게 한 것인데, 편집자가 그것을 깨끗이 지우는 ‘오류’를 범해서 나온 것이 『피터 래빗 이야기』. “포터의 핵심은 뿌옇게 칠한 그것이었다. 그 생물들. 우리가 생물이라고 일컫지도 않는!”

다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박성관의 설명. 생물학 교과서에 나온 상리공생, 편리공생. 그것은 공생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본 무엇. “이 책 쓴 이유 중 하나는 이점을 꼬집기 위함이다. 경쟁이고 협동이고, 모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다. 부르주아도 협동은 바란다. 이익이 된다면. 진짜 공생은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공생을 사유할 수 없게 돼 있다. 더 큰 나를 구성하는 것을 협동이라고, 공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주고받는 거. 그 외에는 상상을 못한다. 이익 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부르주아는 그래서 이를, 생존경쟁이라고 바꿨다.”

고로, 다윈이 말한 것은 생존경쟁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분투! 자연은 선택으로 충만했기에 다윈은 이를 ‘자연선택’이라고 썼다. 그러나 해석한 이들이 이를 ‘자연도태’로 바꿨다. 적자생존? 그것은 전혀 다른 말. “그것이 다윈의 얘기와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썼다. 원전을 갖고 대조하면서 그걸 보여줬다. 읽고 나면 부르주아 근대인들이 왜 다윈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는지,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이 책을 쓴 목적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존의 창조론적 과학자들과 진화론자들 모두에 대한 공격이었다.… 다윈이 넘어서야 했던 논적이 창조론뿐만 아리라 진화론, 즉 당대의 모든 박물학자들이었다는 것을 깊이 유념한다면, 다윈이 왜 그렇게 발표를 지연했는지, 또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시점에 가서도 왜 자신의 책이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초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pp.33~34)

자연선택,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다윈의, 『종의 기원』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우월한 것이 남고, 열등한 것이 도태되는 건 자연도태일 뿐, 자연선택이 아니다. 다윈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자연선택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연계라는 야생에도 선택이라는 작용이 있다. 또 하나는 자연스러운 선택. “다윈 당대에 주변에서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바꾸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 바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적자생존으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싫어했다. 자연선택이 신비주의라면서.”

박성관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반대 개념으로 문화를 들먹이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편견이란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고, 목적을 갖고 변경을 가하면 문화라고 한다. 식물에게 문화가 있나? 지렁이에겐 문화가 있나? 없다고 그러잖나. 그런 태도가 잘못됐다. 내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활동 중의 하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거다. 어떤 잔인하고 위대한 일도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문화도 그렇다.”

말인즉슨, 이분법 타파하기. 가령, 생물-무생물 나누기. 이걸 어떻게 나눌 수 있냐는 거다. 책 부제에 생명의 다양성, 운운했지만,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 아닌 세계의 다양성이란다.

“예전에는 무생물을 생물과 이 정도까지 대립시키지 않았다. 의자에도 영혼이 있다고 했다. 근본적 차이가 없고, 정도의 차이라는 거지. 식물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백인남성에서 출발했다. 과장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그랬다. 고릴라 지능을 4세의 지능이라고 하잖나. 놀라운 건, 인간만을 척도로 하는 그 척도가 없는 한 과학연구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박성관은 주장한다. 인간이라는 척도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 동물실험도 그렇고.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지금 과학자들의 카드패는 버려야 한단다. 다윈은 이걸 넘어섰다. 생물-무생물 구분이 아닌, 공통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 주체(개체)와 환경을 깨는 것.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들은 이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했다. ‘아, 그럼 인간이 가장 진화했다는 얘기지?’ “침팬지와 사람은 유전자를 보면, 1~2% 차이밖에 안 난다. 그러면 상식적인 사람, 합리적인 안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우월하지 않구나. 몇 년 전 생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했는데,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 결론이 뭔가. 하나, DNA가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구나. 둘, 인간과 침팬지는 큰 차이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끝까지 우월하고 싶었던 앙탈(?)이었다고 할까. “다윈은 인간과 지우개, 민들레, 거북이가 공통조상의 후손이라고 말했는데, 과학자들 인정하지 않는다. 도그마다. 그 구조 자체가 도그마로 돼 있다. 지금의 과학은 인간중심주의가 없으면 작동을 못하게 돼 있다. 그래서 인간게놈프로젝트도 DNA가 중요하다고 해 놓고선, 결론이 그렇지 않으니까, 이 중에 뭐가 발현되는지가 중요하구나, 이게 생물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어떤 결론이 나와도 안 바뀐다. 양파가 인간보다 유전자가 훨씬 많은데, 그래서 역시 DNA가 중요하지 않았어, 라고 말한다.”

인간을 척도로 한 다양한 이분법 구상은 결국, 백인남성의 우월함을 계속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내러티브. 그 이분법은 또한 이런 것이다. 동식물의 차이에 대한 통념을 보자면, 동물은 이동을 하고, 식물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다윈은 『식물의 운동력』을 통해 식물이 동물보다 더 많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줬다. 도구를 이용한다고 해서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라고 일컫지만 제인 구달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만이 아님을 알려줬다.

“우리 인간의 핵심 중 하나가 선택인데, 선택을 확실히 하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다윈이 자연선택을 버리지 않은 이유가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이라고 하면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체가 없이도 주체 중의 최고라는 하는 신보다 더 훌륭하고 풍부한 선택효과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다윈은 전율했다. 그래서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썼다.

(다윈이) 20여 년을 연구하면서 가장 집중한 것이 언어문제였다. 생물을 얘기할 때, 거주자, 출생지, 이런 단어를 일부러 썼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500페이지 동안 딱 두 번 잠깐의 예로, 썼을 뿐, 전혀 쓰지 않았다. 그걸 쓰면 과학자들이 반대하니까. 다윈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은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사상의 불온함, 혁명성은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이 『종의 기원』을 못 읽게 만들고 재미없게 만들었다. (웃음)” 

“인간은 결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이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다윈의 메시지는 유폐되었다. 지난 150년간 부르주아들(혹은 근대인들)은 다윈의 생각을 근대적 메스로 끊임없이 수술하고 성형하였다. 우선 다윈의 과학 비판은 종교 비판으로 협소화시켰다.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고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 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적 가치의 대변자로 타락했다. 우리가 아는 다윈이 탄생한 것이다.”(pp.17~18)

과학개혁이 필요한 이유

박성관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과학이다. 정확하게는 대중과 유리된 과학. 과거 『종의 기원』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과학자라고 읽거나 과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굳이 철학, 문학, 과학... 이런 식으로 나눠서 습득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단다.

“과학개혁이 필요하다. 소설이 재미없으면 소설가를 욕하면서 과학책이 재미없으면 왜 스스로를 욕하나. (웃음) 지금 과학이 왜 중요해졌냐면 종말론 때문이다. 르네톰이 한 말이다. 20~21세기의 종말론은 다 과학에서 나왔다. 주류과학과 서구적 내러티브에 지배되고 있는 거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상식의 회복이고, 과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 이해시켜달라고 하면, 그건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외우지 말고 토론해야 한다.

문학이나 철학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이견도 제시하는데, 과학은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냐고 물어야 한다. 철학이나 문학은 묻는데, 과학은 묻지 않고 이해시켜달라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데, 진짜냐고 묻지 않고, 기독교인은 믿으려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고로, 박성관 가라사대. “과학을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좀 똑똑한 친구. 설명해 달라고 해야 하고, 이해되게끔 책을 잘 쓰라고 말하고. 소설에 개연성이 없다고 말하듯, 과학에게도 그래야 한단다. “대중이 바뀌어야 과학이 바뀐다. 과학이 대중과 멀어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 됐다.”

『종의 기원』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보다 과학자를 비판했다. 즉, 과학 비판서. 19세기만 해도 과학자들은 창조론자였다. 생물-무생물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니 생물학 따윈 없었다. 돌부터 모든 것이 연속성으로 이어질 뿐, 무생물이 없었다. “푸코의 『말과 삶』이 그래서 위대한 책이다. 나누지 않아야 앎을 구성할 수 있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랬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하등동물의 피를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다윈의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150년 전에 당대의 세계와 모든 앎의 체계를 의문시했던 다윈은 사라져 버렸다. 나도 다윈처럼 내가 사는 세계와 앎의 체계에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던 차에 『종의 기원』을 만났고 거기서 다윈의 의문들과 불온성과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을 가리키는 풍요로운 빛살이었다.”(p.18)

다윈은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혁명이었다. 하지만 다윈은 우리에게 온전히 오지 못했다.

“혁명의 소식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150년 간 목이 졸려 있다. 다윈은 창조론을 비판한 사람이라는 아이콘으로 만들어졌다. 다윈이 말한 것이 성선택이다. 다윈은 매력을 사고했다. 내가 그걸 무척 좋아하고 나의 주제이기도 한데, 진화는 매혹이다. 오해 마라. 자연과학자 얘기를 인문학적으로 매력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날씬한 여자를 선호한 것은 현대적인 현상이라는데, 아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보면 허리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가늘다.”

“그러나 다윈은 알았을까? 자신의 이론이 미처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핵심을 거세당하고 진화론이라는 결론만 덩그러니 남아 버릴 운명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운명이란 또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 그 흉한 모습이 완전 대박이었다. 기존의 과학에 대한 다윈의 비판은 잊혀지고 창조론과 맞짱 뜬 거인으로만 우뚝 서자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했다.”(p.17)

다윈의 매혹이론에 따르면, 사슴뿔이 커진 것은 암컷이 뻑 갔기 때문이고, 곤충이 뻑 가서 아름다운 꽃이 생겨났다. 우리가 사슴뿔을 보고 뻑 가고, 꽃을 보고 뻑 가는 것은 우리도 동물이기 때문.

“성선택이 뭐냐면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근거가 없다는 거다. 언어, 도덕․사회, 예술 등이 인간과 동물을 차이라고 하고, (인간이 아닌) 동물에겐 사회가 없고, 우리만 법이 있다고 그러는데, 법이나 룰 없이 동물사회가 운영될 것 같나. 아니다. 걔네도 룰이 있다. 우리가 룰을 가진 이유는 걔네들과 동일한 이유다. 우리는 있는데, 얘들도 있을까, 가 아니다.”

박성관은 좀 더 예를 든다. 도덕관념? 약자에 대한 돌봄? 저축? 예술? 천만에.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만 가진 것, 아니다. 다른 동물에서도 이런 예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예를 들어, 보노보(피그미침팬지)는 약자를 돌보고 프렌치키스를 나눈다.

“미래를 생각해서 저축하라는데, 그건 부르주아에게만 좋은 거다. 우리가 저축한 돈은 자본가들이 쓴다. 그래서 저축하라는 거다. 있지도 않은 개미와 베짱이 얘기까지 하면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예술(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을 깨려고 한다.”  

다윈은 자연계 암컷과 수컷의 모양새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일이 수컷이 아름다운지, 암컷이 아름다운지, 적어보니 9대1 수준으로 수컷이 아름다운 것이 많았단다. 왜 이런 것까지 했냐고? 이 세계에 생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책이 지루할 만도 했지만, 박성관은 이를 악물고 두 번을 읽었단다.

당대의 학자들은 매력과 실용을 나눌 수 없다며 다윈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다윈은 매력에 빠지는 매혹의 순간을 어떻게 얘기했을까. 얼이 빠지거나 혼이 빠지는 것. 그것을 매혹의 순간으로 규정했다.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그 순간에 내가 바뀌는 그런 어떤 순간.

“선택이라는 말이 신학 용어라서 쓰기도 했지만, 암컷이 수컷을 보고 ‘아~’ 하는 순간, 즉 매혹의 순간이 있다. 기존의 심미안이 해체되면서 새로이 구성되는 순간이다. 강력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이 반복되겠지. 다윈은 이런 말을 했다. ‘미적인 표준이 수 백 수 천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돼서 2차 성징이 결정된다.’

미적인 표준으로 일관되게 활동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예술을 인간만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윈은 인간이 공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그릴 수 있냐고 되묻는다. 다른 과학자들은 매력이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윈을 비판했다. 생존에 도움이 되고 물리적 조건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다윈과 『종의 기원』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

다시 말하지만, 다윈은 물리적 조건에 의존한 과학을 깨고자 했다. 또한 관계를 사유했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를 처음으로 사유한 사람이다. 모든 생물은 여러 마리이며, 다 다르다는 것. 털끝만한 차이가 생사를 가르며, 인간만 예술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

다윈은 그렇게 함의가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종의 기원』은 여전히 현대 생물학(자)와 대립하고 있다. 박성관이 『종의 기원』을 리라이팅한 것은, 『종의 기원』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 그래서 다윈은 13년 뒤인 1872년에 『종의 기원』 6판을 내면서 아예 한 장(章)을 새로 끼워 넣어 과학자들의 비판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바로 이 상황, 당대의 창조론자와 과학자들의 이론을 다윈이 모두 비판해야만 했던 이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윈 혁명’을 이해할 수 없다.”(p.14)

우리는 ‘자연선택’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윈과 『종의 기원』은 제대로일까. 박성관은, 부르주아들과 과학자들이 덧씌운 포장으로 우리는 왜곡된 다윈을 만났다. 창조론을 깬 아이콘으로만 박제될 다윈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다윈이 본 세계의 근사함, 돈 엄청 들인 여행으로도 알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맛보지 못했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지났으면 어떠랴. 제대로 알았던 적도, 읽은 적도 없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다윈과 만나는 것은 근사하고 멋진 신세계를 펼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시 아나. 그것이 당신의 세계를 전복시키거나 뒤흔들 혁명적인 모멘텀이 될지. 다윈과 연애를 계속 할 것이라는 박성관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가라사대. “인류는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 말은, 인류는 이제야 똥오줌 가릴 줄 알게 됐다는 뜻일 텐데, 150년 전의 혁명적 사고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거나 부러 오독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아직 ‘미물’ 딱지를 떼기는 글렀다.

만물의 영장? 개뿔. 만물의 영장이 설쳐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어허, 통재라. 뭐, 그렇다고 좌절은 말고. 만물의 영장이 아닌 미물임을 인정한다면, 이 정도까지 온 게 어딘데. 다윈이 나왔듯, 당신도 다윈이 될 수 있고, 『종의 기원』이 있었듯, 『미물의 기원』도 어쩌면 기대해봄직. 그렇게 된다면, 가장 보통의 누군가는 당신과 생일이 같음에 괜한 우쭐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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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규항 선생님의 말씀 중 많은 부분은, '교육'에 집중돼 있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금 아이들에게 행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아이들을 놀게 하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를 가진 친구나 선후배를 만나 얘기를 듣자면,
비혼에 아이 없는 나는, 많은 그들이 미쳤다고 혼자 마음속으로 쭝얼쭝얼.
심할 경우, '저거, 진짜 부모 맞아?'하는 생각까지 드는 경우도 있는데,
'아이를 낳아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는' 부모 면허(자격)증도 있어야 하지 않나, 라는 얼척 없는 공상까지도 하게 된다. 

대부분 그렇다. 
(사)교육비 때문에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고개를 수그리고 마는데,
지도 힘들고, 아이도 힘든 그 일을,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수행하고 복무하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이 낳아 길러보면 안다고? 조까라 마이싱이다. 

심히 과격하게 말해서, 부모가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지 머리속에선 타인이 주입해놓은 생각만 날뛰고 있어서,
내속엔 내가 아닌 남이 살아서,
부모 아닌 사육사 혹은 조련사가 되고 만 길을 택한 게지. 

그게 다 아이 잘 되라고 하는 거라고?
에이, 그런 얼척 없는 변명을.
명박 오야붕이 만행 저지르고, 밑의 꼬붕이 삽질 하는 게,
우리 못 되라고 그러는 줄 아나.
다, 그넘들도 잘 해보자고, 선진사회(!) 이뤄보자고 용을 쓸 뿐이다.

네 글자 유서.
규항 선생님이 전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래, 정신줄 이젠 좀 당겨야 하지 않겠나.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조악한 핑계 따위, 이제 그만 뚝! (뾰로롱~) 
사육사로 살지 않아도 되는, 그것이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부모가 되는 방법, 분명히 있다. 함 들어보시라. 

지난 4월21일, 규항 선생님을 만났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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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결혼도 않고, 아이도 없는 네가 어떻게 이해하겠니”라고, 혀를 찹니다. 아이들은 무조건 놀아야 하고,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명분으로) 학원에 보내는 일은 아이를 망치는 일이며, 경쟁을 내면화하는 지금의 교육(이라고 쓰고, 사육이라고 읽는다)은 미쳤다는 제 의견은 그저 ‘몹쓸 말’로 치부하지요. 그래도 소심하게,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냐”고 반박하면, 역시나 어르신 꾸중하듯 날립니다. “시끄럽다. 결혼해서 애 키워봐라.”  

뭐, 인정합니다. 아이 없는 원죄(?)랄까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 받는 거야, 별 무상관이지만, 눈에 밟히는 건, 아이(들)입니다. 저 부모라는 작자의 강고한 인식이 지속된다면, 그 아이의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일 테고, 그 몸과 마음은 곧, 우리의 내일이자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어른들의 틀에 아이들을 끼워 맞추려는 저 무뇌아적 안간힘이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해서도 아님을 압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며, 아이들이 나중에 잘 살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죠. 그러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아이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안중에 있어도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강요를 하는 부모의 감정은 과연 어떨까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글쎄요 이럴 경우, 아픈 만큼 망가진다, 아닐까요.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도 자기들만의 문화가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자. 아이들이 자기 눈높이에 맞춰 놀고 즐기면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돕자.” 놀이운동가 편해문 선생님도 이런 말씀 하셨죠.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어릴 때 제대로 놀지 못하면 평생 몸도 마음도 병든다.”

아마, 이 말들은 지금의 한국에선 소수의 사람에게만 먹힐 씨알일 겁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비슷한 이야길 들려주는 한국(인) 엄마가 있습니다. 무터킨더(‘엄마와 아이들’이라는 뜻의 독일어)라는 아이디로 블로그를 통해 ‘독일 교육 이야기(http://blog.daum.net/pssyyt)’를 들려주던 그 엄마.

특별한 엄마,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엄마. “‘내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어떤 학부모가 되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정답은 ‘치맛바람 1등 엄마’다. 내가 독일 교육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알게 된 것도 교육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기 때문이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키워볼까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최고의 과외 선생을 찾아다니던지 성적우수 학생들만을 위한 그룹 과외를 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p.201)

그런 엄마가 행복한 교육에 대한 이야길 들려줬습니다. 우선, 『꼴찌도 행복한 교실』(박성숙 지음/21세기 북스 펴냄)을 통해. 이어서 지난달 21일 서울 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에서 열린 『꼴찌도 행복한 교실』출간 기념 강연회를 통해.

테마는 이랬습니다. ‘1등 교육을 넘어 행복한 교육으로’ 저자 박성숙 선생과 어린이 교양잡지 <고래가그랬어> 발행인인 김규항 선생이 함께 한 시간. 교육이 무엇이고, 이 엄혹한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교육시키면 좋을지 고민한다면, 한 번 들어봄직 하겠습니다. 책 읽어보면 더욱 좋을 겁니다.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거든요.

학원 전전하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교육

자, 우선 우리가 겪은 제도권 교육을 생각해봅시다. 지나간 과거라고 미화 말고. 이런 풍경, 떠오르죠?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본 세계는 33제곱미터 남짓 되는 좁은 교실의 어두운 벽과 녹색 칠판뿐이었다. 그 위로 쏟아지던 분필 가루를 마시며 미래를 꿈꾸었고 그 꿈속에서는 언제나 책에서 본 세상만이 뿌옇게 그려지곤 했다.”(p.9)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던 감언이설에 힘없이 끌려 다녀야했던 노예시절. 다소 극단적인 말이지만, 저는 학창시절을 그리 기억합니다. 공부 잘 하면 우성, 꼴찌는 열성으로 구획지은 끔찍했던 풍경.

독일에선 꼴찌라는 말, 없답니다. 꼴찌부터 일등까지, 그냥 다 같은 학생인 거지요.

“자극적으로 말하고 싶어서 (책 제목에) 꼴찌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웃음) 독일에는 성적표에 등수가 없어서 1등, 꼴찌가 존재하지 않거든요. 공부를 못하나 잘하나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독일) 교육이어서 이 제목을 그렇게 지었어요. 독일에서 12년 살았어요. 한국에서 경쟁에 치여 살다가 독일에서 12년 동안 두 아이 키우면서 너무 다른 교육에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은 손이 근질근질 했는데, 독일에서 적응하는 게 더 다급해서 10년 동안 글 안 쓰고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지켜보다가 2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요, 이젠 박 선생이 말하는 독일 교육, 엿봅시다. 참, 독일 교육이 완벽하거나 완전무결할 것이란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시고요.

“독일 교육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의 환경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만족이 나 하나만으로 그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독일 학교의 모습을 나와 같이 교육에 관심 많은 한국의 학부모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지금처럼 성적에 목숨 걸지 않아도 예쁜 우리 아이들을 삭막한 경쟁 속으로 내몰지 않아도 밤 열시가 넘도록 학원을 전전하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p.11)

1. 독일 학교는 우등생을 위한 곳이 아니야

독일 학교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과 달리, 중하위권 중심의 수업이 진행된답니다.  1~6점의 성적 분포가 있는데, 가장 높은 성적인 1점을 받는 학생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1등만 차별받는 세상’이랍니다.

“독일에선 1점을 이상적인 점수로 생각하지 않아요. 학교 공부 외에 더 공부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나가게끔 내버려둡니다. 교실에서는 3~4점 받는 학생들에게 더 신경을 쓰죠. 주인공은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아닌 거죠.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으쓱하고, 그를 부러워하는 면도 있지만, 제도가 부추기진 않아요. 그게 우리와의 차이점이죠.”

“우리의 학창 시절은 성적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왠지 1등을 하는 아이는 인생도 1등일 것 같았고 생각도 반듯해서 항상 바른 길만 갈 것 같았다. 당연히 그의 미래도 700여명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환상이란 말인가. 신문 1면의 굵직한 기사마다 등장하는 1등만 했던 일그러진 군상들은 오히려 대형 범죄와 시퍼렇게 날이 선 오만과 독선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병들게 하기만 했다.”(p.20)

그러니 자연, 독일 성적표에는 등수가 없습니다. 성적을 갖고 석차나 줄을 세울 수 없는 시스템인 거죠. 우리처럼 등수로 아이들을 구획 짓는 일, 당연히 없겠죠? 방금 1점이 이상적인 점수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대신 2점을 선호한답니다. 1점은 이기적이고 융화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한 반면 2점은 타인과 어울릴 줄 알고 공동체에서 화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기업체에서도 선호한다는군요.

“독일 학교는 우수한 아이들을 지원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균에 못 미치는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데 더 주안점을 둔다고 했다. 잘 하는 아이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대학에 가서도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그리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하위권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며 학교가 그 아이들을 버린다면 사회에서 그들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이었다.”(p.55)

재미있는 건, 예습을 금지한다는 겁니다. “예·복습 잘하라”는 말, 귀에 딱지 앉도록 듣고 말하는 우리로선 깜짝 놀랄 만! 특히나 선행학습을 숭앙(!)하는 우리네 교육풍토로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어떤 선생님은 집에 가서 공부를 못하도록 교과서를 학교에 놓고 가도록 합니다. 만약 반에서 1~2명이 선행학습을 해서, 질문에 손들고 그러면 지적당하기도 하고요. 다른 아이들이 사고를 할 수 없게 방해하고, 선생님이 수업을 준비했는데, 학생이 미리 답을 하면 진행을 못하고 자기 의도대로 수업을 펼칠 수 없다는 이유죠. 그래서 선생님이 선행학습하지 말라고 귀에 딱지 앉도록 얘기해요. (웃음)” 

또 하나, 과외는 하위권 학생에게만 필요하답니다. 사교육비 걱정? 안드로메다 이야기죠. 박 선생도 12년 동안 몇 시간 하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지만, ‘사교육비’라고 든 적이 거의 없답니다. 독일에서 과외는 그야말로 응급처방전입니다. 유급을 한 학생에게 선생님이 과외를 시키라고 권장하고 과외 선생님을 소개시켜주기까지 하는.

“우리처럼 과외가 경쟁의 나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중하권이라도 유급 위기가 없으면 과외를 안 합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등 큰 도시에 있는 한국 사람은 아이에게 과외를 시킵니다. 그런 한국인이 참 많아요.”

우리의 학교와 사교육(학원) 현실과는 참 많이 다르죠잉~ 공교육으로 대변되는 학교는 ‘붕괴됐다’며 생난리 피우면서 학원(사교육)에 매달리는 것이 한국 대도시의 풍경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올만하죠. “학교가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서 잘 배우고 있는지 점검만 하면 임무가 다한다고 여기고 있었다.”(p.39) 

2.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는 아이들

얘길 듣자면, 독일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것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세상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같아요. 아마 한국 대도시에서라면, “공부와 무슨 상관이냐”며 타박 혹은 항의를 들음직한. 

박 선생은 몇몇 예를 듭니다. 우선 어학연수보다 세상일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 우리가 흔히 아는 어학연수. 말 그대로 다른 언어를 배우기 위한 수련의 과정에서, 독일 아이들은 세상을 배우러 간답니다. 우리처럼 미국, 영국 등의 선진국 중심이 아닌, 아프리카, 남미에 많이 가고, 북한에 지원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물론 북한은 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지만.

“처음으로 나가 본 울타리 밖에서 자기보다 덩치 큰 짐을 지고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그래서 세계가 끈끈한 연대의 그물망으로 연결될 수 있구나!’라는 새삼스러운 믿음이 생겨났다.”(p.77)

또 꿈도 구체적으로 꾸는 경우가 많대요. 공부만 잘 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윽박(?)지르는 우리네 풍토와 달리, 꿈을 향해 어릴 때부터 매진하는 아이들, 꽤 볼 수 있답니다. 가령, 정치인이 되고픈 아이에게 대학이나 엘리트 여부는 중요하지 않답니다.

박 선생이 둥지를 틀고 있는 독일의 아헨. 지난해 시장에 당선된 이는, 우리나라 교육체계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대학에 가지 않은 페인트공 출신이랍니다. 와우, 한국이라고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상고 출신의 대통령도 뒤흔든 한국인임을 감안하면, 글쎄요...

세상을 배우기 위해 꼭 필요한 역사. 그런 면에서 독일 아이들은 히틀러를 비판하며 큽니다. “독일의 모든 교육은 2차 대전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이 기초가 됩니다. 수학과 같은 특별한 과목을 빼곤 모든 과목에서 이런 것을 언급해요. 역사나 정치에선 특히 더하고. 독일은 절반이 인성교육입니다. 그것이 빠지면 교육이 존재하지 못해요.”

그런 면에서 박 선생의 큰 아이가 교장 선생님을 인터뷰할 때, 중요한 말씀이 나왔답니다.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의 사회가 어떤 위험성을 갖고 있는지. 오호, 바로 한국 이야기일 수 있겠네요. 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자가 지도자가 됐을 때, 그 위험한 지도자로 인해 맞닥뜨릴.

“예를 들어 대서양에서 해적들이 다섯 명의 양민을 인질로 잡고 100억 유로를 대통령에게 요구했다고 가정합시다. 이때 머릿속에 지식만 가득 들어 있는 대통령이라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돈을 줄 수 없으니 인질을 포기한다’는 결론을 의심 없이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역사 속에는 이와 비슷한 예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해서 지도자가 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지요.”(p.246)

독일 학생들이 세상을 배우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일상적으로 이웃과 세계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1년 내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거나 일주일 내내 수업 없이 학교에 가서 아프리카를 돕자는 프로젝트를 합니다. 아프리카 무용도 배우고 마지막 날에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팔아서 모아진 성금으로 자매결연 맺은 아프리카 학교를 도와주기도 해요.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1년 내내 있어요.”

“나를 놀라게 했던 일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의식에 있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지만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진지함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들의 사회철학과 열린 종교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이 그것이다.”(p.78)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들을 사유하도록 만드는 방식. “그렇다고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 사진이 없어요. 아이들 활동이나 설명을 보면, 아프리카를 무척 아름다운 땅으로 표현해요. 불쌍해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며, 봉사의 사유도 달리 합니다. 받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게. 불쌍한 사진을 보면서 돈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놀면서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문화를 알려주고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있는데, 다 같이 잘 살면 좋겠지, 이런 식으로. 아이들도 공부 안 하니 더 좋죠. (웃음) 놀이처럼 이런 활동을 해요.”

“독일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기부 문화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그것도 단순하게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가져오는 행위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 모금을 하고 케이크를 굽고 장사를 하는 등 구체적으로 발로 뛰면서 배운다.”(p.106)

한국에서 교육이라 함은, 아마도 이런 것? “우리 사회는 진정한 인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교육의 규율에 딱 들어맞는 인간형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슬픈 생각을 하게 된다.”(p.124) 그러니까, 사육이지. 말 잘 듣는 노예를 만드는 것.

3. 독일에서는 놀면서 공부해도 부족하지 않아

아이들은 뭣보다 공부에 짓눌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정정하죠. 잘 놀아야 합니다. 놀이운동가 편해문 선생은 그러셨죠.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어릴 때 제대로 놀지 못하면 평생 몸도 마음도 병든다.”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의 성정을 타고 태어난 우리들이 일에 종속된 것은, 산업화와 맞물린 자본의 획책이었습니다. 더 말하자면 길고, 어쨌든 노는 것이야말로 아이들 세계를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어요.

놀지 못하니까, 지금-여기가 혹시 요 모양 요 꼴? “우리는 왜 그래왔는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왜 그래야만 하는지. 가장 아름다운 10대 후반 꽃다운 나이, 청춘이라는 이름 하나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좋은 봄날 같은 시절에 말이다.”(pp.145~146) 아이들을 닦달하는 것도 놀지 못하는 부모의 변명일지도.

독일 아이들은 교실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없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러냐고요? 천만에. 전날 잠을 충분히 자기 때문이라죠. “아이들이 잠을 줄이고 뭐한다는 상상을 못합니다. 건강이 최고라서요. (독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얘기하면 다 넘어가요. (웃음)”

“독일 사람들은 왜 영재를 우습게 여길까. 공부뿐 아니라 천재 바이올린 소녀,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 천재 운동선수 등 ‘천재 어쩌고……’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그 어린 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살인적인 연습을 해야 했을까.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하는데……’이다.”(p.43)

그래서일까요. 독일에서는 공부, 운동 모두 성공하는 게 드문 경우가 아닌가 봅니다. 하나만 죽어라 해도 될 똥 말 똥 하다는 한국에선 깜짝 놀랄 일. 책에 나온 스테판 선생님의 둘째 아들 미하엘 스테판이 그랬다지요. 프로 탁구 선수 출신의 기업 고문 변호사인 미하엘. 물론 독일에서도 한 사람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쉽지 않다지요. 아니, 이렇게 박 선생은 말합니다. “독일인들은 성공에 죽자사자 목을 매지도 않기 때문에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의외로 두 가지를 모두 이룬 사람도 적지 않다. 느슨한 사회 분위기가 그것을 가능하게도 하는 것이다.”(p.203)

대학 못(안) 가면 곧 죽는 것처럼 겁박하는 사회. 한 번 낙오되면 영영 수렁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처럼 협박하는 사회. 루저로 낙인찍히면 운신도 못하게 포박하는 사회. 범죄 혹은 악행만으로도 명박(?)할 수 있는 사회. 아니, 마지막 것은 실수. 우리 사는 한국은 이렇다죠.

그렇다면 박 선생이 독일에서 얻은 깨달음은 이런 것. “인생에서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아니 한 사회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점수로 줄을 세워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에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p.206)

독일은 대학을 못(안) 가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내재화된 사회입니다. 중하위권에 맞춰 수업할 수 있는 이유는, 1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대학을 못(안) 가도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이스터. 즉, 직업교육 받은 뒤 중산층 문을 열 수 있는 길이 독일에는 널려 있다는 군요. 우리에게도 박 선생의 말씀 같은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성적이 되어도 대학을 안 가는 아이들이 독일에는 많아요.”

4. 독일에서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

독일의 학부모는 마음이 참 편할 것 같아요. 우선, 촌지가 없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죠. 한국의 촌지 이야기를 하면, 한 1500광년 아주 멀리 떨어진 안드로메다 행성 이야기를 하는 줄 알겁니다. 물론, 어느 나라에선가는 한국 부모들이 촌지 수출(?)을 하면서 그 쪽 선생님들에게 한국 촌지 문화를 널리 퍼트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독일 어딘가에도 한국 부모가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겠죠.

한국의 육성회, 그러니까 학부모들의 바람이야 유명합니다. 치맛바람이라고 하죠. 교육의 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과 목소리가 높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제가 언급한 것이 뭘 뜻하는지는 대충 아시죠?

독일에선 그 학부모 대표는 봉사하는 몸과 마음만 필요하다는 것이 박 선생의 설명입니다. 돈? 어느 학부모나 다 같이 씁니다. 무기명으로 자동이체 시키고. “독일의 학부모 대표는 봉사하는 건데, 명예롭게 생각하니까, 시간 있는 사람들은 서로 손 들어서 하려고 해요. 보니까 우습더라고요. 남지도 않은 거 저리 하려고 그럴까. (웃음) 이 사람들은 그걸 참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봉사하는 마음만 필요한 것이 육성회, 학부모 대표에요.”

“부모는 자식의 할 일을 하나하나 챙겨주며 이리가라 저리가라 방향까지 정해주는 역할이 아니라 뒤에서 지켜보며 힘들어할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거리 서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놀던 아이가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어스름 해가 지면 슬며시 집이 그립고 어머니가 생각나듯이 어머니는 그런 존재여야 합니다. 놀이터를 점령하고 친구들까지 줄을 세우는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p.167)

5.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위한 교육

공동체. 함께 산다는 것. ‘사회적’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지요. 독일 교육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독일 교실에 물론 왕따도 있고, 자기만 생각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한국은 그런 분위기가 좀 있잖아요. 공부 잘 하면 인간성도 좋아 보이는. “독일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중에 이기적인 아이들이 좀 있어요. 친구 관계가 마음만 맞으면, 집이 부자고 가난하고 상관없이, 공부 잘 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1등과 꼴찌가 충분히 친구가 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독일에선 절대 터부시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독일인’. 수업 시간에 이 말을 꺼내면 밖에 나가야 하거나 지적을 받는 답니다.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에 기초한 교육인 셈이죠. “독일 교육은 애국심을 배제합니다. 애국심은 우리만 잘 살자는 주의라는 거죠. 우리 독일인,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말이고요.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잖아요. 대통령이 무슨 일 할 때, 가장 내세우는 말이 조국, 우리 독일인, 우리 한국인과 같은 말이죠. 우리나라가 금 모으기를 할 때 독일 TV에 나왔는데, 되게 신기하게 보더라. 좋다 나쁘다를 떠나 아직 이 나라에선 이렇게 한다며. (웃음)”

“이들은 ‘경쟁에서 이겨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는’ 교육을 중요시한다.”(p.21)

6. 창의력, 실용성,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교육

독일 교육은 단순 암기와 주입식 교육을 배제합니다. 이에 따라 창의성과 공동체에 어울리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죠. 그 창의성은 어떻게 나올까요. 박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의성도 경쟁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확신해요. 세계 학력경진대회가 열리면 우리가 상위권이고 독일은 이십 몇 위를 하곤 해요. 그럼 독일에서 뭘 배울 수 있느냐고 하는데, 실제 깊이 있는 교육은, 경쟁이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들은 창의, 실용,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교육을 통해 ‘어떤 삶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도록 합니다. 과연 한국의 교육은 어떨까요. 어떤 삶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까요. 혹시 무조건은 아닐까요. 남보다 잘 난. 남 보기에 버젓한.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결국, 누구든 짓밟고 서라는 명령을 주입하고 있진 않을까요.

김규항․박성숙 선생, 교육을 말하다

박 선생의 독일 교육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가 됐습니다. 이어서, 아이를 위한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인 두 아이의 아버지와 독일에서 온 두 아이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진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것도 한 번 들어보시죠.   

김규항(이하, 규항)

경쟁교육 하에서는 깊이 있는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체험을 통해 단언하시는데, 한국은 어떡해야 하나요. 한국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면 10~20년 후에는 인성에 문제가 있고, 생각도 깊지 않은 어른이 돼서 우리 사회를 채우게 되는데, 이 얼마나 암담한 이야기입니까.

교육 문제가 한국 성인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하면 위장전입은 기본인데, 대개 고개를 숙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그러면 분위기가 누그러집니다. 교육은 그렇게 상하 좌우 무관하게 삶을 규정하는 문제입니다. 한국은 사실 교육문제가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대학입시 문제입니다. 대학입시를 빼면 교육 문제가 있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대학입시 문제를 교육문제로 치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사람이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고 있지 않습니다. 껍데기는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가 뼈대인데, 한국에서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생각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얼마짜리로 키울 건가 생각하고, 스펙이나 등급을 얘기하고 등급을 매깁니다. 지금 한국 교육의 목표는 인간적 등급을 매기는 것이고, 사회적 공식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절차가 대학입시입니다. 어떤 등급이 매겨지는가에 부모들이 올인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다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그 문제로 삶과 경제가 재편되고 심지어 가족이 생이별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다들 말하는 교육문제가 실은 교육문제가 아니다. 교육문제는 단지 대학입시 문제의 다른 이름이며 교육의 목표는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울 건가가 아니라 얼마짜리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일 뿐이다.”(추천의 글, p.6)

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독일에서 사니까 이렇게 하지만, 여긴 한국인데, 아무리 옳고 좋다고 해도 한국에서 가능하겠냐, 우리 현실에선 어렵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죠. 그런데, 어떤 교육을 하는가는 한국인가 독일인가와 무관합니다. 어떤 사회이며 국가인가는 무관한 고유한 부분입니다. 독일에서도 한국과 다름없이 하는 한국 부모가 있고, 한국에서도 아주 적지만, 독일식 교육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 선생님 얘기 중에 독일에서 왕따가 이기적인 아이라고 했는데, 그걸 들으면서 흐뭇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웃음) 저도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고1 여자, 중1 남자입니다.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엄격했고 가장 타협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사람 배려하지 않고 행동할 때.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 취급 못 받았습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우리가 사수해야 될, 내 아이를 사람으로 키우는데 있어 최소한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 부모들은 극심한 경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워낙 내몰려 가다보니 그런 걸 잊게 됩니다. 독일에선 부모가 소홀해도 학교를 통해 보완되는데, 한국은 (부모가) 각별히 사수하지 않으면 어디서든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주 각별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독일 사람들의 상식과 인간적 태도들은 한국에서도 몇 십 년 전 시골이나 동네에서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던 태도입니다. 교육을 왜 받느냐면, 기본 인성에 더 깊이 있고, 사회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지성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이웃과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인성을 파괴하는 교육이기 때문에 아이를 키울 때, 그런 문제에 대해 각별하게 하나의 전쟁처럼 사수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제 얘기만 했는데, 박 선생님과 이야길 나눠보겠습니다. 만약 바로 한국에 돌아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여느 한국 엄마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한국에 돌아오면 교육을 어떻게 할 것 같으세요.


박성숙(이하, 성숙)
먹는 것만 해결되면 한국에 돌아오는 것 고민 안 합니다. (웃음) 독일에 산다고 한국 사람이 경쟁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독일에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이들 과외를 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내가 한국에 와서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특별히 걱정은 않습니다. 명문대 졸업한다고 잘 사는 건 아니잖아요. 한 두 사람 빼고는 다 평범하게 삽니다. 그런 식의 삶을 독일에서 경험했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여유 있게 살지 않을까요.

아이들 교육 문제는 걱정 않습니다. 독일에 가서 처음엔 저도 정말 힘들었어요. 고통스럽고 두려웠죠. 아이를 저렇게 놔둬도 될까.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데, 더 지내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사실 독일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나 뒤셀도르프 등 몇몇 도시에 있는 한국 학생들은 이곳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공부에 치여 한국에서처럼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p.280)

규항 
가수 루시드 폴의 근래 인터뷰를 봤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선망하는 학벌이나 스펙을 갖고 있는데, 불안정한 음악을 전업으로 하는 것에 대해 질문했더군요. 루시드 폴이 그랬습니다. 친구들을 보면 하루 5시간 자고, 개인 시간도 없고, 경쟁 때문에 저리 사는데, 왜 내가 편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음악 하는 걸 고생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보통 경쟁에서 이겼을 때, 우리 아이에게 주어지는 실질적 이점들을 부각해서 생각합니다. 그런 삶이 진짜 좋은 삶인가, 각박하고 시간도 없고 올라갈수록 경쟁 심해집니다. 물론 선망 받고 우쭐해서 사는 맛에 살 수도 있지만, 경제적 안정은 있을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삶, 아닙니까. 경쟁에서 이기는 삶이 초라하고 아이의 삶에서도 손실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답답한 게, 한국 부모들은 인생을 준비기와 본격기로 나눠 생각합니다. 열아홉 살까지는 준비기, 스무 살부터는 본격기. 열아홉까지는 본격기를 위해 준비하는 인생이라 힘들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에선 오늘이 인생이고, 오늘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일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놀고 즐기고 사랑하려고 태어난 건데, 박정희부터 일하고 미래를 준비하라고만 했어요. 이건 정신병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라는 건,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일 자체를 위함이 아니잖아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보다 밝은 내일’밖에 없습니다. 계속 내일입니다. 오늘이 없어요. 그 다음 나이 들면, 우리 아이의 미래. 이런 바보 같은 삶이 어디 있습니까. 미래를 어떻게 살고 하는 것도 좋지만, 강박에만 빠져 있어요.

요즘 아이들은 스무 살을 넘으면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사귈 때 스펙으로 사귑니다. 진짜 사랑은 중학교 때나 하는 거죠. 결혼할 때 사람 인성을 보나요. 조건이나 스펙을 보는데, 그건 성매매 계약이지, 결혼이 아닙니다.

아, 제가 말이 길어졌는데, 독자 여러분의 질문도 함께 받겠습니다.

아이가 한국에 들어와도 문제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그쪽 문화에 적응했다가 다른 아이가 자라온 환경과 생각을 이해 못하고 분열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성숙 어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 학교를 경험해보고 싶어 집 옆의 학교를 찾아갔는데,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적응 못할 거라고. 한 마디로 오길 원하지 않았고, 이방인이 와서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게 관심사 같았습니다. 그 학교가 명문 고등학교라 하던데, 집이 가까워 갔을 뿐이었거든요. (웃음)

어쨌든 아이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도 자기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적응하고 친구를 사귈 수도 있습니다. 독일에도 한국 아이가 와서 적응 못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규항 독일에서 상식적인 환경에서 살다가 한국의 야만적이고 체념적인 상황에 처해도, 바른 교육을 받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둘러 싸여 있어도 불편을 겪기도 하지만,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더라고요. 옆에서 보면 근사하고 멋지니까.


독일에서 경쟁이 별로 없고 대학을 안 가도 원하는 직업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사는지요.

성숙 그게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이 제가 알기로 83%인가 그렇고, 핀란드가 92%라고 알고 있어요. 독일은 대학진학률이 39%입니다. 그 중에 졸업하는 게 50%니까, 20% 정도가 대학을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우리보다 훨씬 대단하게 봅니다.

중요한 건, 독일엔 명문대학이 없습니다. 20%는 거의 비슷한 수준의 대학이고, 서열이 아닌 평등한 관계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면 대학에 갈 수 있고, 대신 많이 놀면 졸업을 못하죠.

경쟁을 없앨 수 없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문대를 없애면 됩니다. 그래서 불가능하죠.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하죠.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부모들이 많이 바뀌어서 대안학교도 가고...

“우리도 이제는 사교육을 잠재우겠다고 입시 제도만 가지고 흔들어댈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을 제공하는 명문대학의 존폐를 고려야 보아야 한다. 아주 극단적인 방법이겠지만 전국에 있는 특목고를 모두 폐지하는 것보다 몇몇 명문 대학이 사라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p.287)

규항 대학을 꼭 가야한다는 생각이 합리적이진 않습니다. 저나 박성숙 선생님이 대학갈 때 진학률이 20%였는데, 지금은 90%에 가깝습니다. 독일의 대학진학률이 40% 정도 안 되는데, 한국이 독일보다 고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구조는 아니거든요. 공포나 강박 때문에 대학장사꾼들이 대학문을 열어놓은 거지, 진짜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서라면 대부분의 대학 가는 아이들이 헛일을 하는 상황이죠. 대학을 가지 않고 소박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나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도 적성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애들이 있습니다. 한국 부모들은 아이가 운동에 적성이 없다고 하면 편하게 인정하는데, 공부에 적성이 없다고는 쉽게 인정을 못합니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 안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머리가 나쁜 겁니다. 공부가 사람의 절대적인 가치가 되니까, 공포가 있는 겁니다. 한국에는 머리가 좋은데 노력 안 하는 애들이 너무 많은 거죠. (웃음) 

아이가 지금 31개월 됐고, 직장 때문에 강남에 살게 됐는데, 요즘 공포심을 느끼게 됐습니다. 지금 동네에서 보면, 밤 10시에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차가 늘어서 있어요. 이 동네에 계속 살게 된다면, 아이에게 사교육을 안 시켜서 아이가 행복하고 원하는 삶을 살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탈출해야 하나, 나 혼자 끌고 가야하나,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성숙 그런 사회에 들어가면 나 혼자 초연할 수 있을까, 자신 있게 얘기를 못하겠네요. 그런데, 엄마가 잘 생각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규항 그 동네가 어떤 엄마한테는 위장전입이라도 하고픈 가치가 있을 테고, 그 동네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요. 교육이 뭔가, 하는 가치기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 하신 분은 후자에 가까운 사고 같은데, 생각대로 결단하는 것이 자기 존중을 할 수 있는 길이고, 아이에게도 떳떳한 길이 아닐까요.

학원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학원도 분명 보조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원을 금지해야 하나요. 학원은 그런 기능이 있는데, 그게 전도돼서 학원의 기능적인 학과 교육이 실제 인성교육을 포함한 교육을 뒤집어 버리는 그 풍경이 끔찍한 거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누구든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공립 고등학교 교사인데, 한 부류는 대학을 가고자 하고, 다른 부류는 이미 대학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고민은, 아이들이 대학을 가겠다면 성심껏 지원해줄 수 있지만, 안 가겠다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조언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성숙 한국 교육 현장의 문제라 어려운데, 독일은 그럴 때 고민이 안 됩니다. 대학은 성적이 돼도 안 가는 애들이 많고, 마이스터라는 길이 있기 때문이죠.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대학과 직업의 두 가지 길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대학에 가야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거라고 얘기하지만, 독일에선 이 길도 저 길도 좋아서, 위험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독일 교육 이야길 들려주는 건 어떨까요. (웃음)

규항 지금 당장 묘안이 있을 수 있다면 한국 교육에 문제는 없겠죠. (웃음)


두 아이 아빠로 아내가 초등 교사입니다. 아내가 학교를 울산부터 대구, 서울로 옮겨오면서 보니, 사교육을 받고 안 받은 차이가 심하다고 하더군요. 오늘 이 자리가 행복한 교육으로 갈 수 있겠다, 해서 왔는데, 대안이 없는 느낌도 듭니다. 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큰 틀에서 우리 교육의 숙제나 앞으로 우리 교육을 위해 쓴 소리를 해주신다면요. 

성숙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명문대를 없애면, 바로 모레 변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부모들이 의식을 개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문제는 아닙니다. 학부모들의 문제가 가장 크고, 기득권 욕심에서 오는 문제들이죠. 의식을 바꾸는 길 밖에 없습니다. 천천히 가겠지만, 의식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알고 모르고는 천지 차이거든요. 이 세계가 전부다, 우리가 사는 방법이 전부다, 라고 생각 말고요.

저도 독일에 처음 갔을 땐, 독일 사람들이 다 바보처럼 보이더라고요. 머리에 든 것도 없이. (웃음) 우리는 머리에 든 게 지식 밖에 없잖아요. 제가 대표적인 예인데, 저도 12년 동안 조금씩 바뀐 겁니다.

“독일 교육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경쟁에서 벗어나면 학교교육은 깊이를 가질 수 있으며 청소년들의 삶의 질은 더불어 향상 된다’는 진실을 알 수 있다. 명문 대학이 바로 우리 청소년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경쟁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p.288)

진보주의자들 가운데서도 대학을 안 가도 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자식에 대해서만은 그런 말을 못하기도 하더라.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성숙 대학을 무조건 안 보내자고 하는 운동은 아닐 겁니다. 가는 사람을 막을 순 없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고도 보는데요. 공부하고 싶은 아이가 대학을 가겠다는 것을 부모라고 막을 수 있겠어요.
규항 전적으로 그렇진 않으나, 제가 알고 있는 얘기를 들려드리죠. 이번에 서울대에 들어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회 저명인사의 아들이 있습니다. 외고를 나왔는데, 아빠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들씌워 비난해선 안 되나 과정이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경쟁교육 비판하는 사람이 자기 아이의 경쟁력 앞에선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인 거죠. 그 아들의 담임이 보기에도 흉했던 모양입니다. 교사가 실망했다고 그 저명인사에게 얘기했더니,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부끄러워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말하길, 그게 부끄러워하는 거냐, 부끄럼을 감수하겠다는 거지. (웃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그런 부분들에서도 많이 있는 거죠. 성명서나 토론 등에선 그렇게 말하면서, 내 아이의 경쟁력에서 별개로.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싶진 않고,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아이의 부모에 대한 존경이 파괴되는 것 아닙니까.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상에 그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있습니까. 위선적이라기보다 어리석은 거죠. 왜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의 존경과 존중심을 깨트릴까. 굳이 진보 교육운동 안 하면 되는데. 편하게 살면 되는데. 스스로도 괴롭고 자식의 존경심도 파괴하고.


역시 교육 문제라 열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정된 시간을 넘어 후끈 달아오른 현장, 그렇게 슬슬 마무리가 됐지만, 교육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회적인 문제건, 그 근원에는 교육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행해지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집착과 사육이 불러올 파행은 다른 모든 분야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부동산 거품의 기저에 자리한 그 맹목적인 교육열을 보세요.

솔직히, 지금 비혼에, 무자식이기에 다행이라고 자위할 따름입니다. 혹 아이가 있는 상상을 하면 괴로워집니다. 한국을 떠나지 않는 한, 이 제도권 사육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가장 보통의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제도권 학교엔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모를 문제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구절의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1등으로 수영하는 것보다 함께 수영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p.69)

함께 수영한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 교육은 그런 사회적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어야 하고요.

남을 이길 재간이 없으니 루저로 버티고 견디는 자의 어설픈 교육론이지만, 아이는 무조건 놀아야 하고, 때론 아이가 끼워준다면 함께 노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는 생각으로 강연장을 빠져나왔지요. 아울러 지금은 고래동무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고래가 그랬어>를 구독해서 아이와 함께 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 함께 다시 고민합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펼칠 수 있고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문적이고 인간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지요. 교육이란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립적이고 창의적으로 또한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겠지요.”(p.247)

[예스24 채널예스 기고원문]


사진제공 : 장선웅 님! 고맙습니다,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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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말하자면, 나는 극소심한 '김규항 빠돌이(항빠)'인데, 
몇 년 전, 지인의 결혼식에 규항 선생님이 주례를 서신 것을 보고,
정말이지 부러웠다. (그때의 주례사가 궁금하다면,  ☞ 주례사)

늙어가는 이 총각은 우습게도, 멋진 선녀선남 결혼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규항 선생님을 주례로 모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 기억이 난다.

오죽하면, 선생님 주례를 하사받을 수만 있다면,
누구하고라도(그것이 남자라도?), 덜컥 결혼(식)을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짧게...ㅋㅋ
(뭐, 지금은 행여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주례 없는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시기상 여름의 끝물이었지만,
여름이가 그리 순순히 물러날 손. 후끈후끈.
뜨거웠던 그 여름, 그럼에도 내 심장을 더 뜨겁게 달궜던 어떤 강연.

규항 선생님도 강연자로 자리하셨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했던 그날의 이야기.

마침 그날 8월28일은,
1963년의 그날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DC 링컨기념관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세기의 명연설(물론, 표절 의혹이 있긴 하나)을 한 날.

그날의 강연은 그리하여, 한편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에겐, 타인이 주입한 것이 아닌, 어떤 꿈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참, 언급한 바 있지만, 내 생의 F4는, 여기 강연을 하신 분 모두는 아니고,
규항 선생님은 F4에 포함되지만, 나머지 세 분은 다른 분들이다.
다시 더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게다. 

2009/08/30 -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 'F4'를 만나 오르가슴을 느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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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가 묻는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독자만남] 『괴짜사회학』출간기념 괴짜 학자들 4인방 대담회


울먹인다. 대학 신입생이란다. 이제 스물 언저리의 청년. 지난 5월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에 나갔다가, 전과자가 됐고, 억대 소송도 당했단다. 평범한 사람인데, 전과자가 되고, 보복이 들어오고.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무게. 두렵다고 했다. 옳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지만, 이 사회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한다. 이 옹졸함을 어찌 하오리까.

울먹이던 그가, 진중권 교수에게 마음가짐을 묻는다. 장내는 숙연하고, 내 속에서도 울분이 끓어오른다. 내 안구도 젖는다. 대체 누가 무엇이, 평범한, 별다른 죄도 짓지 않았을 법한 이 청년을 울린 건가.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이에 대한 진 교수의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자.


그래, 잘 들어라.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왜냐 하면, 이것은 ‘F4’를 만난 기록이기 때문이다. 구준표, 윤지후, 소이정, 송우빈, 그 이름만으로도 꺄아~ 소리 지르고 싶겠지만, 그깟 애들, 잊어라. 돌멩이 맞을 각오로 하는 말이지만, 그따위 F4, ‘저리 가라’다. 그렇다면, “도대체 뉴규?”라고 묻겠지. 좋다. 김규항, 우석훈, 진중권, 홍기빈이다. 꺄아아아~ 소리 지르는 당신, 그래! 이 혼미한 세상에서, 그나마 제 정신이로군. 하하.
 

사진제공 : 프레시안


지난달 28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이른바 ‘괴짜(학자)’ 네 명이 모였다.(그러니까, F4의 ‘F’는 ‘Freaks’의 줄임말?) 김영사, 예스24, 프레시안이 주최한 행사, <『괴짜사회학』출간기념 대담회 “괴짜 학자들, 한국 사회를 뒤집어 보다”>를 위해 모였다. 수디르 벤카데시(Sudhir Venkatesh) 콜럼비아대 교수(사회학)의 <괴짜사회학(Gang Leader For A Day)>의 출간을 기념한다는 명분. 이 괴짜들의 대담은 무려 4시간을 넘어, 따로 쉬는 시간도 없이 달렸다.

따라서 이것은 웃고 울리며, 그들과 함께 호흡했던 시간을 담은 기록이다. 괴짜들이 펼치는 괴짜 대담. 당신도 괴짜(가 되고 싶다)면, 작금의 한국 사회를 고민한다면, F4를 만나라. 이것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 청진기를 들이댄 불온한 아이콘 4인방이 전하는 지금-여기의 환멸을 참고 견디는 법. 쥐의 공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 사회를 맡았던 김민웅 교수의 인사말로 그 진단은 막을 올린다. 

“반갑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괴짜사회학』이 고민한 것이 우리 사회에도 통할 수 있을까를 진단해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카고 빈민가의 흑인 갱단에 들어가 갱들과 어울리면서 지역 문제를 파헤치다가 보스와 친해진다. 4년 정도 갱과 어울리면서 저자는 마약, 매춘, 재개발 등등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늘 4명의 소장 중견학자를 모셨다. 이 분들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거침없이 일격하면서, 우리 사회를 눈뜨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분씩 모셔서 얘기를 들어보자.” (박수) 

각자의 심볼로 알아보는 F4의 근황

‘88만원 세대’, 우석훈 교수 : 『88만원 세대』는 당초 전체 12권 정도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자 시작했다. 한국이 갖고 있는 독특한 20대 문제를 다루면서 2천권이 팔리든지, 10만권이 팔리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봤다. 20대가 책을 안 본다고 가정하면 2천부, 20대가 보면 10만부라고 예상한 건데, 출판사는 1천부를 봤다. 그런데 예측이 틀렸다. 10만부가 넘었다. 『88만원 세대』로 20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약간 환기가 된 것 같은데, 문제가 풀린 것은 없다.

다만 1~2년 내 폭발적인 전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사람이라는 게 너무 맞고 무시당하면 못 참거든. 1~2년 내 못 참을 때가 올 것 같다. 대통령이 이명박이니까. 다음 계획이라면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한 7년 정도 됐는데, 마흔이 되면 은퇴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지금 마흔이 됐는데, 은퇴할 준비가 안 돼서 아직은. 장소는 서울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다. 우리밀 소주를 만들고 싶다.

‘뇌주름 섹시’, 진중권 교수 : 잘리는 경험이 처음인데,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지 몰랐다.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저들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잘 생긴 것도 아닌데, 다만 뇌주름이 섹시하다고는 하더라. 통섭교육은 생산력 형태가 달라지는데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다. 통섭은 좌우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다 하는 것이다. 반대하는 분들은 생각이 없는 분들이다. 아예 무대를 뽀개고 있으니. 교수자리 3개를 끊고, 저들은 내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이다.

‘싸가지 없다’는 지적이 많은데, 내가 싸가지까지 있으면 큰 일 나지 않겠나.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참 답답하다. 풍속의 감시자인양, 왜 어법 갖고 문제를 삼는지. 진중권의 문체가 하나만은 아닌데. 어법의 강점?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지는 거다. 가장 훌륭한 복수는 적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지는 거다. 한 달 반 동안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새 책을 한 권 썼다. 미술작품 12개 정도를 뽑았다. 유명 명화는 아니더라도 느낌이 와서 꽂히는 것들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칼 폴라니’, 홍기빈 : 우리는 지난 100여년 동안 시장경제체제를 놓고 없애느냐, 살리느냐, 고칠 거냐, 이 세 개 옵션만 놓고 논의해 왔다. 그러나 폴라니는 (이 체제가)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기 전에, 이것이 인간사회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차원이 다른 종류의 얘기다. 지난 금융위기를 거치며 미국에서는 케인즈가 복권됐다고 하는데, 케인즈 복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장이 인간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환경문제다. 케인즈는 금융시장을 아주 혐오했고, 범죄적으고 문제 많은 제도라고 생각해서 정부를 통해 고쳐야 한다고 봤다. 칼 폴라니가 시장 문제에서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회였다. 케인즈와 하이에크를 지나 이번에는 폴라니 차례가 돌아온 것 같다. 80년대 초부터 형성된 신자유주의 지구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끝났다. 지금 상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정치와 경제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잘못됐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경제학자에게 속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할 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22조원을 투입하겠다는데, 고속철 사업에서 보듯, 예산은 짓다보면 늘어나고 잠재 예상은 100조원이 될 거다. 그 100조를 확 나눠줬으면 좋겠다.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 『나는 왜 불온한가』는 출판사 마케팅팀에서 붙인 제목이다. 바꾸면 안 될까 하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민망한 제목이다. 불온은 중립적인 말이다. 민주화 30년은 정치적 민주화를 말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자본에게도 자유를 줬다.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아이들 보면, 민주화된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땐, 학생과 교사가 서로 ‘건설합시다’라는 구호를 하면서 경례를 했다. 참 더러운 세상이었다. 또 그 때는 오후 3시에 소재가 파악되는 아이들은 아프거나 징계 중인 아이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노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1시간 정도 소재가 파악이 안 되면 사고다. 세계에서도 아이들이 이렇게 생활하는 아이들은 대한민국 밖에 없을 거다. 민주화가 됐는데, 지금 아이들은 군사파시즘 시절의 아이들보다 더 못하게 살고 있다. 어른들도 비슷하게 살고 있고. 지금 이명박 씨가 우리에게 하는 모습과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는 모습이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계에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게 아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치관이나 철학이 잘못된 사람이라서 그렇지. 아이들 미래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 건 똑같다. 우리 안에도 이명박이 있다. 어떤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 자체도, 체제가 내면화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이건희를 욕하는 사람과 이건희와의 차이가, 돈 있고 없고의 차이 밖에 없다면, 그건 차이가 없는 거다. 『예수전』은 예수가, 우리의 문제와 고민들을 직관적으로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해명해 주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에서 썼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어서 섭섭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집이 보수 신도들에게 포위되고 린치 당하고 이럴 줄 알았는데. 2권을 쓴다. 교회 개혁운동 얘기 많이 하는데, 이건 좀더 근본적일 필요가 있다.


이어진, 대담의 시간. 사회자 김민웅 교수가 토론에 앞서, 『괴짜 사회학』의 배경인 ‘시카고’가 미국에서 가지는 역사적․사회적 의미와 인도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얘기를 꺼내며 화두를 던진다.

“부자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질문만 던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답만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을까? 용산참사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괴짜 사회학』은 재개발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빈민을 쫓아내기 위한 것임을 폭로한다. 용산참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 한국에서의 경찰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진중권, 이하 진) 촛불집회 처음에는 달랐다. 커피를 주기도 하고, 닭장차를 타면 제도화된 민주주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정권에서는 적대적이 됐다. 요즘 경찰의 구호가 ‘국민에게 달려가겠습니다’인데, “제발 오지마”라고 말하고 싶다. (웃음) 섬뜩한 느낌이 든다. 과거의 경찰 이미지가 다 무너져 내렸다. 80년대의 익숙한 경찰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우석훈, 이하 우)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노무현 정부 중간에 경찰국가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자본주의가 경찰 없이는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번 정부 와서 그 속도가 빨라진 거다. 정서적으로 경찰국가에 사는 게 괴롭다. 5년 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는 주의인데, 한국 우파들은 참 무능하고 치사하다.

국내총생산(GDP) 2만달러 정도 가면 대개 지하경제를 통제하는 수준이 돼야 한다. 지금 통계상 10~15%를 지하경제로 보는데, 실제는 그보다 더 클 거다. 한마디로 깡패국가다. 두목이 이명박이고. 지금 시스템은 깡패들이 살기가 제일 편하다. 비공식 경제는 깡패들이 갖고 있는 비중 높은 편인데, 사실 그건 경찰들이 막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경찰 보여준 모습은 비열하다. 

(홍기빈, 이하 홍)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경찰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경찰 조직이 공적 기구인지, 민간 행위자인지 헷갈리는 거 같다. 가령, 소방서가 불을 꺼준 뒤 수도값 내라고 얘기하고 대원들 다친 돈 내놔라고 하면 골 때릴 수 있는 건데. 지금 경찰이 손배소송을 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공적기구라기보다 사적영역에서 싸움꾼 행세를 한다는 거다. 근본적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걱정된다.

(김규항, 이하 김) 남미에 가보면 부잣집 앞에 라이플을 든 경비들이 있다. 경찰들도 부자 편인데 그것도 모자라 사설경호원까지 둔다. 군사독재에서 자본독재로 전환하면서, 경찰 임무가 국가기강과 같은 것보다 부자들 이해를 돕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경찰이 바뀐다기보다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를, 경찰이 하는 짓을 보면 파악할 수 있다. 

-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진제공 : 프레시안

(김) 비폭력주의가 2000년대 이후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선 중요한 얘기로 회자되고 있다.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한 적 있는데, 세상에 폭력주의자는 한 명도 없다. 폭력이 좋다고 말 하는 놈은 한명도 없다. 변태나 사적인 영역에서 미친 짓하는 사람 아니면. 부시도 악의 축에 맞선 저항이라고 했지, 폭력이라고 한 적은 없다.

말로서 비폭력주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서재나 일 년에 빰 한 대 맞을 일 없는 안온한 사람이 폭력은 나쁘다고 말장난 일삼는 건 정말 끔찍한 폭력이다. 작금의 촛불에서의 폭력이 대단한 폭력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어폐 있지만, 사람이 사회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평을 봐서 더 못한 사람, 그 전에 생각을 못했는데, 더 많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는 폭력주의자에 의해 희생당한다. 예수, 간디를 봐라. 간디는 비폭력주의자였지만 항상 폭력의 현장에서 있었다.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 80년대 관통하다 보니, 어딘가로 끌려가고 물도 먹고 매혈도 해야 맞았다고 말할 수 있지. (웃음) 경찰버스창을 깨고 이러는 걸,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다. 사실 법질서의 토대가 폭력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 사회는 과개발의 정치와 저개발의 정치가 어정쩡하게 겹쳐 있다. 과개발은 선진국, 저개발은 후진국형인데, 촛불집회가 전형적인 과개발의 정치였다면, 용산사태는 전형적인 저개발의 정치였다. 폭력을 얘기하기 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용산 같은 경우가 성남에도 있었는데, 아무 문제없이 해결됐다. 해법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 그것을 해야 한다.

(우) 내가 제일 폭력주의자일 것이다. (웃음) 짱돌 정도는 던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방화는 안 되지만, 유리창 정도는 깨도 된다. 프랑스에 살았는데 3년 전 프랑스 정부가 시행하려고 하던 고용법이 통과가 안 됐다. 프랑스 시위가 평화롭다는 말은 다 뻥이다. 걔네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앞에 대형 스피커를 달아놓은 무대차가 지나간다. 그 위에서 애들이 그냥 춤추고 논다. 프랑스 대학생들은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면서 꽃을 들고 다닌다. 그 뒤로 십대 청소년들, 무장한 10대가 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깨고 눈에 보이는 것은 불지른다.

생각해 보라. 십대가 불 지르면 뭐라 하기도 참 난감하잖나. 걔들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나라엔 무장 10대가 없어서 지는 구나’ 싶다. 앞으로 집회하는 분들은 전략적으로 무장 10대를 달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방화는 하지 말자가 내 소신이다.

(홍) 폭력하면 대개 물리적 폭력 말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 사회 심한 폭력은 언론이다. 특히 조중동. 이들 신문을 가끔 보면 섬뜩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증오와 적대를 선포하는 신문을 보지 못했다. 깡패 용어로 다구리라고 하는데, 이건 몰매를 맞는 게 낫지, 이렇게 당하는 건 문제가 크다. 우리 사회는 이런 폭력을 폭력으로 보고 제어를 하는 게 약하다. 조중동은 정치적 논조와 무관하게 폭력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시장의 폭력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면, 줄빳다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에 있다. 일본의 통치 구조를 보면, 천황을 정점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 저울형태다. 천황이나 상급자가 줄빳다를 치면 그 사람은 아래 하급자를 패고, 인간 피라미드에 의해 빳다의 물결이 흐르는, ‘다단계 빳다’가 형성된다. 돈은 위로 흐르고 빳다는 아래로 내려간다. (박수)

유럽 근대국가는 사회 전체를 법과 국가 폭력 앞에 줄빳다 세우는 원리로 형성됐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줄서야 된다’는 거다. 19세기 들어오면서, 이 줄빳다 논리는 시장으로 간다.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에서는 국가 줄빳다에서 시장 줄빳다로 전환하는 순간이 2/3를 차지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가는 과정이 전 사회를 줄빳다 놓는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시점이 줄빳다의 논리가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는 시점이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이것저것 다 필요없다. 돈 버는 게 장땡’이라는 합의가 이뤄지고 있잖나. 이 합의 위에 세워진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에 비유하자면 유신과 같다.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는 72년에 유신이라는 폭거와 마찬가지로 시장이 본격적으로 사회를 줄빳다를 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우) 선진국은 사람들 행위가 돈으로 50% 이상 설명되지 않는 국가를 말한다. 반면 후진국은 90% 이상 행위가 돈으로 설명이 된다. 프랑스가 (GDP) 2만달러 넘어설 때, 독일계 가수의 노래가 1등 먹었다. 부자들 조롱하는 노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땠나. 2만달러 넘어설 때, 너나 할 것 없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을 썼다. 그렇게 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원래 시장은 폭력적이나 합리성이라도 있는데, 한국은 촌스럽다. 주먹, 돈 많은 작자들의 치사함이 있었다. 게임값 물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 한국의 시장이다. 시카고, 파리, 런던은 시장의 폭력을 얘기할 수 있는데, 한국은 돈에 대한 욕망만 있지, 시장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의 속도가 퍼진 만큼의 속도로 망할 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노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삽질하는 나라는 생각하는 나라를 이길 수 없다.

- 왜 가난은 발생하는가. 빈곤은 뭘까.

(홍)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근대사상의 허구가 있다. 부와 자유가 개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잘해서 개인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가능하나 산업사회는 불가능하다. 농경사회에서는 나라님이 뭘 하든, 전쟁이 나든, 내가 내 땅에서 노동을 해서 거뒀다고 할 수 있으나, 산업경제에서 누가 어느 만큼을 기여했느냐는 회계분석을 해도 안 나온다. 사회 전체가 다 같이 뭔가 하지 않으면 풍요해질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존 로크나 아담 스미스가 농경제가 압도적일 때 이론을 만들다보니, 산업경제에서는 절대 적용할 수 없는 거다. 자유주의는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부유해질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섣불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식으로 경쟁시켜서 게임을 하면 사회 전체는 거지가 된다. 서로가 사회 전체의 파이를 늘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게 되고.

지금의 경제학은 파이가 느는 것, 그 사람이 돈을 벌었다는 것은, 사회에 기여를 했다는 증거라고 가르치는데, 이건 기만이다. 농경제 시대의 빈곤발생 메커니즘과 산업화 시대의 빈곤발생 메커니즘은 다르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산업조직을 어떻게, 부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르기 때문에 빈곤은 철저히 사회적이다. 분명히 산업경제에서는 개인의 부가 아니라 집단의 부가 먼저 있었다.

(김) 예수는 철저히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내일 입고 먹을 일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깊은 통찰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 체제에서는 가난하다는 의식이 또 가난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빈곤하다고 할 수 없는, 오늘 삶에 감사하고, 문화적 풍부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정이라는 공포가 있다. 절대 빈곤 상태는 아니다.

진짜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얘기할 틈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뭔지 떠들만한 것도 없다. 잔고가 0인 사람은 걱정이 없는데, 잔고가 100만원인 사람은, 잔고가 80만원으로 내려가면 불안하다. 아직 가난하고 모자란다는 생각이 실제적인 가난을 만들기도 하고, 내 아이니 미래를 위한답시고 죽어가는 거다.

구전 가요 중 진리가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무계획 무책임하게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쉬고 놀고 서로 사랑하고 문화적 활동하면서 사는 것이다. 일은 그런 걸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아직은 모자란다는 의식이 우리 삶을 굉장히 조악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한국이 재난영화의 현실이다. 재난영화에서 아이를 가진 부모가 할 일은 정신을 차리는 일이지, 아이 손을 잡고 미국으로 가는 일이 아니다.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런 걸 떠나 ‘내가 아직은 가난하다’는 의식 자체가 오늘의 삶을 없앤 것이다. 내년이고, 5년, 10년이고 공포에 젖어 가는 거다.

이명박 씨가 민주적 절차로 뽑힌 것도 한국의 정치적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의 심리다. 이명박 씨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 하나로 대통령이 된 것도 시민들 스스로에게 가난하다는 공포가 작용됐기 때문이다. 정말, (이명박 씨는) 미감을 해친다. 사실 신경 쓰지 말자고 해 놓고선,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웃음) 아이들에게 (이명박 씨가) 왜 싫으냐고 물었다. 초등 고학년들인데, 스타킹으로 씌워 놓은 것 같단다. (폭소) 성찰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 멈추고 한번 되돌아보자 얘기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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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1970~80년대에는 체계적인 기아가 없었다. 90년대 들어 기아인구가 전세계적으로 늘어난다. 지금 전 세계의 딱 반이 기아인구다. 세 끼를 다 못 먹는. 한국은 1%가 세 끼를 못 먹는다. 그렇다면, 누가 가져갔느냐.

기아가 생긴 이유를 다국적 기업이 가져갔다 얘기하는데, 그건 정답이다. 세상의 빈곤이라는 게 없어질 수 있을까. 정치인을 정의해보니, 빈곤과 싸운 사람이 진짜 정치인이었더라. 인류는 국가를 만든 이후로는 빈곤에게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밥은 먹여라’, ‘아프면 치료해줘라’, ‘공부하고 싶으면 책을 좀 줘라’, 이것만 하면 ‘좋은 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거 세 개 다 해결이 안 된다. 태어나면 이 정도 해줘야 하는데, 부모들이 이걸 해 줄 수 없으니까, 애를 안 낳는 거잖나.

- 학교는 뭐하고 있을까. 대학은 죽어가는 반면, 비제도권에서는 인문학 강연이 풍성해지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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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대학이 다 망해가고 있다. 기업 연수원 비슷해졌다. 대학이라는 것은 국가와 협력할 때는 하고, 시장과 협력할 때는 하고, 국가나 시장이 잘못되면 경고시스템을 줘야하는데 그걸 안 한다. 근시안에 의해 대학이 몰락하고 있다. 인문학, 사회학 등 다 죽여 놓고. 한 대학은 교양필수과목이 ‘회계학’이다.
미래는 상상력이 콘텐츠가 생산력의 시대 아닌가. 일본 만화를 보면, 이건 그냥 만화책이 아니다. 웬만한 인문서적보다 낫다. 우리나라는 아니다. 성과 없으면 감사하고, 이런 발상들만 있다. 우리나라에도 콘텐츠 학과라고 있다. 뭐 배우냐고? 그냥 콘텐츠만 중요하다고만 배운단다. 역사, 철학, 문학 없이, 상상력, 창의력 다 죽여 놓고 가능하겠나. 대학은 사회적 경고음을 날리는 존재다.

(김) 통계를 보니 80년대 초에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20% 정도였는데, 지금은 90%에 가깝다. 대학 가려고 하면 다 간다. 정원이 많아졌고, 상향지원만 않으면. 문제는 대학생이나 부모는 관심이 없다는 거다. 훌륭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 다니거나 보내는 게 아니다.

학벌 없는 사회 운동이 안타까운 것은, 학벌문제를 비판하는 게 학벌주의자라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정서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진보와 활동하는 인텔리는 탐욕이 있다. 공포가 아닌. 내 아이가 좋은 일류대학을 가서 진보 엘리트가 되길 바라는 거다. 욕심도 많지 않나? 노동운동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노동자나 민중이 되는데 공포를 느낀다. 윤리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더 충만하고 행복한가를 따져 묻는 거다.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문제는 잘 산다는 것이 뭐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배체제나 소수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금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 교회 문제를 얘기해보자. 이명박 체제의 문제 가운데 교회 요소가 빠질 수가 없다.

(김)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대형교회를 나가야 한다. 그 안에서 모든 비즈니스와 아이들 결혼 등이 이뤄진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폐해의 연원을 들여다보는 게 유익할 수 있다. 따져 보자.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는 새로운 종교 만들려고 한 흔적이 없다. 예수의 신성조차도 325년 니케아 주교회의에서 결정됐다. 교회와 기독교 문제를 생각할 때 어느 정도까지를 진정한 교회를 두는가, 연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는 사회문화정치의 현상으로서 간단히 비평할 수 있을 뿐인데, 그런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진) (이명박 씨가) 소망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해 주차장 정리했다고 하잖나. 그것은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교회를, 예수를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래서 종교를 버리는 게 낫겠다.

(김) 첨언을 하면, 종교를 버리겠다는 것이 종교적이다. 천당지옥을 얘기하는 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이지, 종교 자체의 것은 아니다. 조화롭게 큰 욕심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이라고 보는데, 현실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 체제다. 종교를 버리겠다는 것에서 종교적인 느낌이 든다. 주변에서 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종교를 버리겠다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다. (웃음)

(홍) 한국자본주의의 정신적 기반과 한국교회의 정신적 기반이 일치하는 게 있다. 무데뽀 정신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겠다는 것이 똑같다. 이건 6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를 얘기하는 것이다. 맨손으로 교회를 만들었더니 캐쉬 플로우(현금 흐름)가 발생하는 거다. 기독교 패러다임과 박정희 이후의 자본주의 패러다임도 똑같다.

인류학적으로 얘기할 필요도 있는데, 교회를 한번 생각해보라. 대단한 비즈니스다. 원자재비용이 없다. 설교자만 있으면 된다. 설교자도 인덕이 있어서 아주머니들을 잘 구슬리면 돈이 생긴다. 이 정도의 현금 회전율을 가진 것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환상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는 내가 보기에 한국 개신교의 부흥교회와 일치한다.

요즘 내 생각은 (교회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다. 돈이 되지 않는 욕구, 상상은 처박아 두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데, 이에 싸워야 되는 사람은, 첫째 인문학자고 둘째 종교인이다. 이런 얘기 팽배할 적에 영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그 질문에만 대답했으면 좋겠다.

교회 얘기에서 떠오른 한편의 영화. 최근 개봉한 영화 <독>에는, 종교에 관심도 없는 아버지, 형국이 갑자기 교회에 나간다. 어릴 때 갔었다는 이유를 들며. 진짜 이유는 물론 다르다. 비즈니스 때문이다. 그의 공장과 비즈니스를 하는 윗집의 박 장로와 장 권사가 기독교인이다.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고 300만원이나 되는 돈을 헌금으로 내놓기까지 한다. 교회의 힘을 본다. 기독교 아닌 한국 기독교의 어떤 힘을 본다. 거기에는 순수한 종교적 열망이나 신념은 없다. 그저 중산층 커뮤니티로 입성하는 단계이자 사업적 관계를 위한 포석,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 어떤 벌도 받지 않고 잘살고 싶은 욕망이 뒤범벅된 우리의 굴욕이 있을 뿐이다. 

- 최근 두 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대통령 당시 비판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아픔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느낀 바가 있다면. 

(우) 노무현 정부 생전에 많이 싸웠다. DJ 때는 정부기관에서 일했다. 그래서 DJ는 공직자 시절의 기억 같은 것이다. 사실 DJ가 돌아가실 줄 몰랐다. 평생의 숙적이라 YS가 죽기 전까지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안 났는데, 앞으로 한국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길이 안 보이더라. 김대중만한 사람이 한국에 나올까. 안 나올 거다. 다만 안티히어로는 있는 것 같다. 안티히어로에 의해 우리가 영웅을 만드는 시절이 오지 않을까.

(홍) 두 양반의 노선을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하지만, 뜨끔하고 괴로웠다. 반대함에도 눈물 나고 죄송했다. 이 두 분이 개인적 신념은 어찌됐든, 이 분들은 중도였다. 두 양반의 노선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면도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기어가면서 속은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

(진) 서거 추모는 추모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잃어버린 10년을 계속 써야 한다. 1년 반 만에 우리는 10년을 잃어버렸다. 두 분 대통령 돌아가신 뒤, 통합 얘기 나오는데,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두 분이 먹고살만한 사람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서민에게는 나쁜 대통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맘이 안쓰러운 것은,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제금융을 수습하거나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말을 할 만큼 신자유주의가 진행된 시절에 권력을 넘겨받아서 안쓰러웠다. 

이어서, 각자 한명 씩 청중석을 돌아다니며, 직접 문답을 나누는 시간이 돌아왔다.

- 중앙대 학생이다. 최근 중대에서 진중권 교수 임용 거부를 계기로 ‘줄빳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나.

(홍) 최근 진 교수가 겪은 일련의 사태를 보면 그렇다. 옛날에 데모했을 때는, 제재가 감옥에 가거나 징계를 당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스펙에 흠집을 내는 방식이다. ‘어디 잘 되나 보자’는 방식이 더 무섭다. 온 나라의 20~30대에게 영어공부 물결친 지가 10년 넘었는데, 이는 기업들이 토익점수를 보겠다고 해서 이렇게 물결이 친 거 아니냐.

그런데 문제는 대기업의 그런 기준에 대해 욕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서점의 경제경영서를 보면 코웃음 쳐지는 책이 있는데, 『마시멜로 이야기』. 대체 누가 100만부나 사라고 한 거냐. 시장 줄빳다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효과는 더 높다. 자발적으로 하니까. 이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보면, 시장 폭력이구나 싶더라. 진중권 선생이 중요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연대할 필요가 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행동도 않고 비판도 않는 20대에 대해 ‘시대 개새끼론’이 있다. 88만원 세대라고 해서 동정도 받지만, 행동을 않는다고 비판도 받는 게 20대다. 왜 이리 비판받고 힘들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20대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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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어느 쪽에도 찬성하는 건 아니다. 내가 신촌을 사는데 연대 쪽으로는 안 간다. 돈, 호르몬, 술이 흐르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라. 육체적으로는 2차 성징이 나타나면 크나, 영혼은 23~24세에 큰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영혼이 큰 인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20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30~40대, 50~60대 부닥치는 문제들 가운데 돈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이 얼마나 강건하고 풍부한가, 그것밖에 없다. 지금 20대들 스펙관리한다고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스물다섯이 넘어서는 영혼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영혼의 크기가 형성되는 시기임을 잊지 말고 70~80세 까지 행복하게 살려면 영혼을 키워야 한다. 스펙 때문에 영혼을 찌그러트리지 말라.

- 10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나,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에 대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 대세를 따라간다는 생각을 버리면 된다. 대학 못가면 어떤가. 20대들이 보수화 됐다는 그런 말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쫄아 있는 것 같다. 쫄아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덜 맞은 것 같다. 아직 3년 반이 남아서 충분히 시간도 있고, 우린 이명박 씨의 얼굴만 조금 본 거잖나. 속마음도 못 봤고, 뇌도 못 봤고. 이명박 씨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 20대 때 농촌으로 가는 것은 지금 가면 뻔하니까, 가라고는 말은 못하겠다. 그런데 책 잘 파는 저자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다. 사회한테 받은 건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 중학교 2학년이다. 3시 반에 수업이 끝나는데 강연이 2시 시작이라 조퇴를 하고 왔다. (박수) 촛불집회에 참여했는데. 친구가 이것을 학교 게시판에 올렸다. 선생님들이 불러 뭐라고 하더라. 10대로서 갖춰야 할 것이 있다면, 사회 나갔을 때 어떤 것을 갖춰야 하는지. 

(김)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이라고 계신다. 아동문학가 중에서 인세수입이 가장 많은 분일 거다. 이 분이 생전에 한달 생활비가 한 30만원이었다. 그것도 당신이 다 쓰는 것이 아니었다. 권 선생 안동 집에 가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뱀이 방 안에 들어오고 정말 생태적인 집이다. 이오덕 선생의 아들 분이 생전에 권 선생을 충주의 소박하고 작은 집에 모셨다. 모시자마자 불편하니 (안동)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권 선생은 가난해야 된다, 그런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그게 더 편한 거다. 30만원 쓰고 집 같지 않은 집에서 사는 게 더 편한 거다. 이른바 ‘자발적 가난’인 거지.

몇 억 원을 벌면서도 이런 식의 삶의 태도가 훌륭하고 가치가 있어서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많이 벌고 쓸수록, 경쟁에서 이겨야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는데, 꼭 그렇지 않다. 가령 대기업 다니는 사람도, 억지로 잡혀 있는 것처럼, 그만두지 않는 가장 고상한 방식을 쓰고 있다. 싫으면 그만둬라. 안 죽는다. 원래부터 대기업 안 다닌 사람도 많다.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에게 나중에 몇 달 후나 1년 후에 물어보면 그런다. 처음에는 조금 힘든데, 훨씬 편하고 가족들도 밝아지고 좋아진 거 같다고.

우리는 위로 꼭 가야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데, 꼭 위로 가지 않아도 된다. 더 나은 삶이 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엄마아빠가 공포에 젖어서 그런 거다. 다른 삶도 가능하다. 얼마든지 비껴나서 살 수 있고, 죽지 않는다. 놀기 위해 살아야 한다. 놀기 위해 일해야 한다.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청중들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대담을 마무리 하면서 사회자가 소회를 겸해 “딱 하루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F4 각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 책 보는 사람들은 절대 지지 않을 거다. 특히 골프 치는 놈들한테는 지지 않을 거다. 내 신념이기도 하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고. 대기업 그만두는 짓을 해 봤는데, 꽤 높은 직급이었다.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더라. 물론 순수하게 그랬다고 말하긴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지만, 12시 전에 일어나는 것은 무조건 싫다. 대기업 그만두고 얻은 2가지 특권이 있다. 넥타이 안 매는 것에 3천만 원, 아침 12시 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에 2천만 원을 걸 용의가 있었다. 어쨌든 대통령은 생각 안 해봤지만, 최근 한국은행장을 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이명박 씨가 등장한 것은, 한국은행장이 나쁜 놈이라서 그런 거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나를 한국은행장으로 만들 거다.

(홍) 대통령이 되면 딱 하나. 사퇴하는 거다. (웃음) 오늘 느낀 바는, 고민의 무게라는 게 알량하게 주둥이로 몇 마디 나불거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자극도 됐다. 사퇴하겠다는 얘기는 정권 잡는다고 우리가 말한 문제가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문제가 풀리는 건 극히 드물고 오늘 고민은 국가권력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진) 대기업 박차고 나오는 건 못할 것 같고, 잘릴 것 같다. 스스로는 못하고 (웃음) 대통령이 되면, 실험할 수밖에 없다. 현직 대통령보다 잘 굴러간다는 것을 입증하고.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씀은, 자기 자신을 배려해라는 것. 자본은 여러분들의 교양, 삶에 관심이 없다. 자본은 자기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관심 있고 필요 없는 건 버린다. 남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말고. 한국사회는 쏠림이 강한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고독함, 무시를 견뎌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3년 하면 전화가 걸려온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김) 사퇴는 하는데, 한 가지 알리는 말씀을 해야겠다. 지구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단순한 말을 들려주지 않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문제는 ‘고래가 그랬어’를 부모가 사줘야만 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고래동무라고 해서 후원자가 있다. 대신 고래에 돈을 내주면, 고래가 300개 공부방, 도서관으로 간다. 잡지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지만, 한 달에 8500원만 내면, 30명의 아이들이 고래를 볼 수 있다.


그렇게 F4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4시간을 훌쩍 넘어 웃고 울고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 이들은 해답이 아닌, 화두를 던졌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선택이 우리 사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지금-여기는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만 들끓는다. 내가 아닌, 남들이 짜놓은 기준에 의한. 행복함이 오로지 자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양새만 가지려는 욕망만. 남의 불향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이상한 세상. 결국 타자를 통해서만 나의 행복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변태다.

김혜리 기자(씨네21)는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는 사회가 꿈꾸기를 허용하지 않을 때 그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개인이 윤리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문학적 마스코트다.” 지금 시대는 그렇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미친놈, 즉 돈키호테가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행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 서두에서 얘기했듯, 진중권 교수는 이런 대답을 내놨다. 정답이 아닌. “가장 가슴 아픈 게 이런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인데, 전과자 되고 보복이 들어오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강의가 잘리고,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소송이 들어오고, 보복을 당하고 있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 괜찮은 것 같다. 시간 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를 괴롭혔던 그 사람들은 욕을 먹고 불의에 대항하다 핍박 받은 사람들은 복권된다. 큰 흐름들은 그렇다. 후퇴도 있고, 업&다운이 있지만, 큰 맥락에서는 장기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버티고 견디는 것. 그것이 내가 일상을 돌파하고, 환멸을 견디는 법이다. 진 교수는 중대에서 마지막 강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자화상에 대한 강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수업. 그렇게 우리는 버티고 견디고 있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함께 버티고 견디자. 그리고 손을 맞잡자.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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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김규항.

다른 삶도 있음을, 다른 삶을 꿈꾸게 해 주신, 내 오래된 선생님.
물론, 꼭 그 가르침대로 오차없이 내가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 덕분에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상식과 교양을 배운다.

여전히 나는 위태하지만,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큰 엇나감 없이 꾸준히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또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해 6월, 선생님과 예수전을 만난 기억을 이제야 담아 놓는다~
내가 좋아라~하는 성미산 마을극장에서의 선생님 강연.

예수에 대해 뭣도 모르던 내게, 
어쩌면 진짜 예수를 알려줬던 책과 강연. ^^

짜잔~ 규항 샘의 친필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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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독자만남] 『예수전』의 저자 김규항

여기 이 사람.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삶을 즐기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별명 한번 볼까요.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자고 합니다.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라는 말도 떠오르네요. 이쯤 보면, ‘파티 피플’의 일원이 아닐까 싶죠? 함께 놀아 보고픈 생각도 들죠?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예수입니다. 어, 진정? 하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네요. ‘예수’라는 타이틀에 대해 실토하자면, 그저 단순했습니다. 인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가 고난과 박해 속에 십자가에 박혔던 분. 성인(聖人). 좀더 나아가봐야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종교 지도자. 그러니까 종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종교 안에 갇힌 이름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근본주의적 전도 행태, 지금-여기의 개신교 일부의 탐욕적 작태까지 가세할라치면, 예수의 이름은 오물을 뒤집어 쓴 듯 했습니다. 그를 믿는(다고 떠벌리는) 어떤 신도들은 파렴치한 행각을 펼치면서도, 예수의 잠언을 끄집어냅니다. 우리네 사람살이는 더 팍팍해지는데, 세를 불린 특정 교회(들)의 곳간은 비대해져가니, 이것도 하느님이 바라는 바인가, 냉소도 하게 되더군요. 누군가는 일전에 서울을 봉헌한다고 그분 이름을 더럽히기까지 하는데, 비신도가 보기에도 예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닌 듯 했지요.

『예수전』(김규항 지음/돌베개 펴냄)을 읽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예수의 진면목은 물론 예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시정했습니다. 과장하자면, 성수(聖水)를 맞은 격이랄까요.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를 다시 봤습니다. 왜 그에게 ‘혁명가’이자 ‘영성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예수가 왜 필요한 인물인지 확인했습니다.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오해에 휩싸인 인물이다. 지배계급이 일찌감치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만들어 버린 후, 사람들은 그 예수를 각자의 세속적 욕망을 신에게 청탁하는 매우 유능한 중계인쯤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오해의 일부라도 걷어 내고 싶었다.”(p.11)

그렇게 오해의 일부를 걷어내 준, 김규항 선생을 만났습니다. 명실상부한 좌파로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이죠. 지난 2일 서울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예수전』 출간기념 강연회(‘예수로 읽는 한국사회’)를 통해서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국민장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경황이 없는 와중이라며 양해를 구한 김 선생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눴습니다.


자, 이제부터 풀어놓을 얘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라!”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과 실천. 잘못 길들인 화폐와 욕망이 길어낸 패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나요. 새로운 세상! 이 말만으로도 벅찬 당신과 함께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세상. 

지금 필요한 건 뭐? ‘나눔 체제’!

“새로운 세상이 되려면 사회구조가 변혁돼야 합니다. 나눔의 체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나눔 체제는 흔히 얘기되는 나눔이나 기부단체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여유분에 대해 나눠주는 동정적인 맥락이 아닙니다. 나눔 체제는 똑같은 인간으로 공정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말합니다. 나누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나누는 체체죠.”


대개의 우리는 말하죠. 돈 벌면 기부할 거라고. 나눔도 자신이 풍족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말인즉슨, 곳간에서 인심난다, 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동정이요 시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서 소소한 일부를 누군가에게 베풀어준다는 우월의식이 섞인. 그것은 자칫하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에 서열과 위계를 만들고, 분리시킵니다. 같은 인간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구획되는 것.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p.110)

김규항 선생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 독일에 사는 한 여성이 트랙백을 걸어서 따라갔더니, 그런 얘기가 있었답니다. ‘독일 사회는 나누기 싫어도 나눌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그만큼 복지체계가 잘 돼 있단 얘기겠죠. “세상은 당연히 그래야죠. 나눔 체제를 만드는 것이 혁명의 내용인데, 그것으로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잠깐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에서 괜히 뜨끔할 필요 없어요. 만약 뜨끔하다면, 수구 기득권세력의 세뇌 공작에 길들여진 것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전원일기 김회장댁의 둘째 용식(유인촌)이 언급한 세뇌. 또 그 순박하고 착한 시골 양반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됐다고, 사람이 확 달라지는 그런 게, 수구세력의 세뇌공작에 의한 것이죠.

사회구조의 변혁, 즉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회복’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억압․착취가 없고, 돈에 매여 모든 것을 평가하고 생을 가늠하지 않는. 경쟁력을 들먹이며 아이를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키우는 것을 멈추는 것.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종속된 화폐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그런 것 말입니다. 혁명이란 것, 별 것 아닌 것 같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 내면을 깊게 파고든 화폐지상주의의 뿌리를 뽑기란 정말로 진정으로 쉽지 않습니다.

변혁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 선생은 내 안의 변혁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자본주의특히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가치관을 심어줘서 스스로를 굴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대중, 보통 사람들은 30~40년 전보다 나빠졌습니다. 과거의 보통 사람들은 인간성이 유지돼 왔고, 그래서 사회도 유지됐어요. 온갖 나쁜 체제가 횡행했지만 사람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과 이건희의 차이는 돈이 있냐 없냐의 차이 밖에 없어요. 가치관이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나 생활양태는 비슷해요.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권력이 접수해서 이뤄진 혁명, 가령 러시아 혁명 같은 경우도 사회성원의 내면화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해 곪은 겁니다.”

그는 거듭 강조합니다. 사회 성원 내면의 가치관이 함께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이런 말을 건넵니다.

“밖에서 들어온 더러운 것은 뒤로 다 나간다. 진짜 더러운 것은 안에서 나온다.” 사람에겐, 적보다 노선이 다른 동지를 더 미워하는 속성이 있답니다. 특히 진보진영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보면 명확하지요. “아무리 훌륭하고 지고한 체제라도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이 균열을 일으킵니다. 이런 걸 어떡해야 하는가. 혁명이나 변혁을 고민할 때,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죠.”

그러니까, 변혁은 혁명은 밖과 안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문제죠. ‘혁명과 영성’이라는 그의 글(한겨레, 5월14일자)이 생각났습니다. “적은 둘이라는 것, 적은 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밖의 적과 싸우면서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것,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 말이다.”

제주 잠녀할머니가 알려준 진리,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

그는 교육방송(EBS)의 <지식채널e>에서 인터뷰한 제주의 잠녀(해녀)할머니의 얘기를 꺼냅니다. 한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스쿠버 장비가 편할텐데, 왜 쓰지 않느냐고. 할머니가 답했답니다. “편하지. 그런데 그걸 내가 쓰면 99명은 어떡하라고.”

“우스개로 제주도 좌파해녀연합의장이라고 했는데, 보통의 할머니이십니다. 평생을 물질하고 그것으로 애들을 키운. 보통 사람들의 어머니요 할머니인데, 주목할 것은 그 사고방식이 몇 십 년 전만 해도 농촌․공동체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이었어요.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였죠.

물론 탐욕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공동체의 환영을 받지 못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부끄럽거나 이상하지 않고 삶의 방식이 돼 버렸어요. 아이들도 그리 키우려고 하고.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결이 지금 같아선 어떤 사회 체제도 괴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20~30년 사이 이렇게 뒤집힌 거예요.”


깜짝 놀랄만한 변화죠. 그것도 나쁜 쪽으로의 변화. 더 큰 평수의 아파트와 더 비싼 자동차를 갖고, 통장의 잔고를 늘리고, 내 몸의 가치(연봉)을 높여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회. ‘무한경쟁’이라는 말로, 남을 짓밟아야 하는 경쟁 체제를 당연시하는 사회. 김규항 선생의 말마따나, 이명박씨는 그런 것을 내면화한 우리를 순정적으로 반영한 인물이죠.

그렇기에 그는 제주 잠녀할머니마냥 보통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의 변혁의 노력인 영성을 회복해야 하건만, “한국에선 ‘영성’이라는 단어가 오염돼서 온갖 영성들이 판을 치니까, 이 말을 하면 오해를 받고, 문제는 영성이 측량․계량화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눔 체제에 조응하는 자발적 가난이나 영성은 결국 각 개체의 자발성에 의해 가능한 부분입니다. 뒤돌아보고 성찰하고 비우는 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해야 할까요.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자, 풍요롭고 충만하리라

“진정한 혁명은 지금으로서는 종교적 형태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몇 십 몇 백 년전 인물들은 종교적이었어요. 모든 생물에는 생명이 있고, 모두 연결돼 있다고 보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 그게 종교적 태도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졌죠. 예수는 짬만 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고된 일정을 보내고도.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출발은, 예수의 표현을 빌자면, 회개입니다. 이 말이 한국에서는 오염됐는데, 보수 개신교가 공격적으로 모든 언어를 점거했죠.”


그가 말하는 회개는 그 개신교에서 들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어로 ‘돌아섦’의 뜻이랍니다. 삶을 전환시키고 가치관을 뒤집는 것.

“기존의 운동이나 혁명을 보면, 가치관 전복이라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아요. 주류 노동운동이 대중의 존경을 잃어가는 것은 부르주아 진영의 음해도 있지만, 스스로 존경을 잃는 부분이 있죠. 노동운동의 가치는 인간이 되는 것인데, 권리나 임금투쟁만 하다보면, 더 상품화가 됩니다. 물론 전태일 열사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제가 말하는 ‘사람답게’는 기존 가치관에 입각해서는 어렵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집힌다는 것은, 남보다 많이 갖고 앞서 가는 것을 불편해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가치관을 정하는 것, 그것이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죠.”

그는 운동의 지향점이 자본의 가치관과 동일하다면, 그 운동은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20대 무렵 처음 운동을 할 때나 대부분 운동의 정서이다 보니, 서른을 넘고 가족이 생기면 현실을 들먹여 운동을 그만두는 것이랍니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정언처럼 나부끼죠.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고, 나이 들어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다.” 전 이 말 무척 싫어합니다. 비겁한 자기변명이죠. 진짜 마르크스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한풀 꺾이면서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 한계가 뚜렷합니다. 물론 타고난 사람도 있습니다.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

“대개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런 사람의 전기를 읽는 사람들이죠. (웃음) 예수는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변혁․혁명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놀았어요. (웃음) ‘파티 마니아’라는 별명이 틀린 것은 아니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는 고통․헌신일 수밖에 없지만, 다음 가치관을 선취한 사람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가치관이 뒤집히는 것을 예수는 회개라고 표현했고, 가치관이 뒤집힌 사람은 더 즐겁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인습에서 벗어나면, 당신은 자유다

물론 가치관을 뒤집는 것,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앞선 시대의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체크나 관리하지 않아도 인습의 틀에 갇혀 자신의 삶을 제한하며 삽니다. 그게 여느 사람입니다. 내면화된 세상의 율법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것.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나 전통적인 사회와 양태는 달라도. 우리를 짓누르는 이런 기제들. 미래가 불안하니까 뭐든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 남들보다 뒤처지면 추락한다는 불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인습.

“이런 것이 집약된 것이 아이들 문제죠. 애들을 생각하면 공포에 빠지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감옥의 수인처럼 키웁니다.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자본주의의 인습이고, 이게 자본주의 지배의 정수죠. 아무리 좌파라도 아이들 교육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인습에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 지배체제의 핵심입니다. 급진좌파라도 다 걸려요. 서로 그래서 (교육)얘기를 안 해요. (웃음)”


그리하여, 결국은 교육이 문제입니다. 땅의 가치와 사람들의 가치관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부동산 문제도 따지고 들면, ‘교육’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그건 교육이라는 말도 붙이면 안 된다고 봐요. 훈육이고 사육이죠. 어쨌든 그는 경쟁이라는 수사에 휘둘리는 세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 경쟁 때문에 큰일이다 뭐다 하는데, 사실 ‘경쟁’은 생각도 못하는 아이들이나 가정도 많아요. 하루 세끼 먹는 것도 감사할 줄 알아야죠. 키보드나 두드리면서 너무 처먹어서 돈 주고 운동하고 살 빼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능력이나 나를 뒤돌아보는 습성을 잃어서 그런지, 인간성이 무뎌지고 파렴치해 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는 불안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불안감이 그 실체죠. 이런 걸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입된 인습에 자신의 삶을 속박하는 사람들, 꽤 많습니다. 삶을 심플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신해철은 15년 전, 이런 노래를 읊었죠.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 질문.

“생각을 전환하면, 인습을 벗어나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옛날에는 인습을 벗어나면 죽음이지만, 지금은 벗어난다고 그렇지도 않잖아요. 한국, 참 재밌지 않나요? 삼성을 욕하면서 자식이나 조카가 삼성에 들어가면 좋아하고. 대기업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게 우는 소리를 합니다. 왜 우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만 두면 되지. 자기가 괴로우면 그만두면 됩니다. 안 죽습니다. 더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나빠지겠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죽지 않아요. 제가 그걸 경험하고 있거든요. 경제적으로 다소 불편해지지만, 그 덕에 달리 보이는 세상이 있고, 또 다른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중요하더군요. 배는 불러오고, 월급은 마약이었죠.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마음으로 믿고 싶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에 몸이 더 솔깃한 나이였습니다. 직장생활 10년은, 그런 때이죠. 더구나 남들 보기에도 버젓한 직장.

하지만, 그건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젖어서 살다보니, 꿈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힌 채, 스무 살엔 혁명을 해도, 마흔만 넘으면 모두 현실 속에 귀순하고야 마는 굴레에 풍덩 빠지고야 말 것 같더라고요. 이도저도 아닌, 죽도밥도 아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박제된 펭귄이 될 것 같았고. 조직의 거짓부렁에 기생한 확성기에 머물 것 같았죠.

그리고 나와선, 버티고 견디고 있죠. 더디지만, 새로운 꿈을 기획하고 만들면서. 아직 많은 고뇌들도 있지만, 가끔은 스스로가 대견합니다. 이렇게 버티고 견디는 것이.

직접적으로 김규항 선생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그의 글을 통해 자극을 받고 존경해 온 저로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는 또 그렇게 몇 명의 대기업 직원을 그만두게도(!) 만들었다죠. 아주 최근에는, 강의를 마친 뒤, 아이를 동반한 한 여성이 부탁을 했답니다.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에 대고 “대기업 그만둬도 잘 살 수 있어”라고 자신의 남편에게 말해달라는. 강의 때 한 이야기지만 맥락 없이 들릴 수도 있고 사진 찍는 것도 힘들어 난감했지만, 그는 부탁을 들어주면서, 속삭였답니다. “잘 사시길..”(‘GYUHANG.NET’-잘 사시길)

인민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변화


그렇습니다. 회개, 즉 가치관의 전복으로서 자유나 해방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사회 변화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죠. 그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실제 인민들의 삶과 밀착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변화. 누구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느냐가 관건인 변화. 

“몇 십 년 전 캐릭터가 케로로 중사나 다스베이더처럼 우리 삶에 침투했지만, (웃음) 이것은 대중들 가치관의 반영이죠. 무식하고 거칠다보니까 30년 전 스타일로 막 되먹은 정치를 펼치다보니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이른바 상식의 정치가 많이 부각되고 있어요.

개혁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에 큰 비중을 차지하죠. 정치적 민주주의나 권위주의 타파 등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30년 전 전 세계 인민을 벼랑으로 몰아넣은 신자유주의가 현실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내몰린 사람 입장에서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조중동(신문)은 신자유주의 극우분파라면, DJ나 노무현 정권과 시민운동 등은 신자유주의 개혁분파라 할 수 있어요. 그들 입장에서는 근본적 차이가 없어요.”

예수는 그랬습니다. 편향적이었습니다. 지배세력이나 기득권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인민의 삶에서 출발했고, 그들과 함께 부대끼고 살았습니다. 예수에게 사회 변혁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변혁이고 진보였습니다. 부자들에겐 감세라는 혜택을 내려주시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에겐 위한 정책에는 인색하고 무관심한, 최저임금까지 깎으려 드는 것, 과연 예수의 뜻일까요. 몰염치한 지금-여기의 최고통치자이자 한 교회의 장로는 한국 교회의 주류 목회자 상이 드러나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예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p.204)

예수의 참뜻도 모른 채, 자의적으로 예수를 끌어들이는 그들에겐 오로지 박제된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했던 일곱 교회를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지요. 촛대를 옮기는 것은, 본디 정신에서 멀어진 교회를 예수 스스로 버리겠다는 선언이라고 하던데, 아마 지금-여기의 주류 교회에선 촛대가 뽑히고 없을 겁니다. 대신 예수는 교회 밖으로 촛대를 옮겨 인민들과 함께 출발할 겁니다.

모름지기, 편향적이 돼야 할 듯싶습니다. 그동안 기득권과 권력 혹은 화폐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굴러갔으니, 균형을 맞추려면 이젠 나눔 체제가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즉각적인 결정적인 변화는 없을 겁니다. 지난하지만 꾸준한 믿음으로 가야한다고 김규항 선생은 말합니다. “당대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오만입니다. 역사를 보면 6개월 만에 혁명을 보기도 하고, 3~4대가 지나도 혁명을 못 보기도 합니다. 조급할 필요도 없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세상은 변화한다는데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가치관의 변혁, 즉 다음 가치관을 선취함으로써 입점할 수 있습니다.”  

책의 얘기도 옮기지요.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살마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너에게 『예수전』을 권한다

집도 저축도 없고, 다음 달 생계를 걱정하고 살지만, 경제적 풍요 대신 다른 풍요를 선택한 그는,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양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현재에 충만하게 살려다 보니 자유롭고, 아이들에게도 신뢰와 믿음이라는 풍요를 얻고 존중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타인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좋고 편한 것을 선택하세요. 편한 대로 사세요. 왜 멋지게 살려고만 하세요. 결단이 필요하고 고통스러우면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예수전』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는 교회 안에서 박제된,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언제든 인민의 곁에서 혁명과 영성을 함께 빚어내는 존재. 신자유주의의 패악이 휩쓸고 간 자리, 아직 그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묻어 ‘대박’을 외쳐대지만, 예수가 그러했듯,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혹은 “우리는 어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당신의 주변에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일단, 『예수전』읽고 시작하시죠. 그리고 오늘, 6월10일. 1926년 6월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출상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6.10 만세운동)과 1987년 6월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항쟁(6.10 민주항쟁)의 날. 우리는 정당한 분노를 알고 있지요. 예수도 무조건적인 용서와 순응이 아닌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뤄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p.189)

그렇게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진정한 용서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요. 오는 6월16일 41주기를 앞둔 ‘김수영’을 권합니다. 김규항 선생은 오래 전, 가까이 두고 있는 책으로 『김수영 전집 2: 산문』을 꼽았습니다. 그는 김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꼽습니다.

“초보 좌파로 자기 규정하는 내가 마르크스주의 원전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서 따위를 끼고 살지 않고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끼고 사는 일은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읽을 때 나는 늘 평화롭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뜨거움의 총량이 지하를 넘어서면서도 그 뜨거움의 방식이 나 같은 치졸한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뜨거움이 한 인간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한껏 고양된 뜨거움이라면 수영의 뜨거움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성격처럼 지닐 수 있는 일상적 뜨거움이다.” 참, 여기서 지하는 ‘김지하’를 가리킵니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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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면서,
세계를 넓히는 계기도 제공했던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

 
이번 월드컵 경기를 보는 와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니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게 됐고, 그런 나를 보는 것이 왠지 불편했고, 고민도 됐다.

문제는,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전.
한국은 이미 16강전에서 패배했고, 더 이상 과격하고 광적인 대~한민국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던 경기였는데, 어쩌다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경기를 보면서 중간에 나는 푸드드득~했다. 
일본이 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일본이 파라과이 진영에서 공을 차고 있으면 불안했고, 파라과이가 일본을 공격하면 골을 넣으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거다.

아니, 왜지? 의문이 뭉게뭉게. 
왜 나는 일본이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 아시아인으로서,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팀 모두가 떨어진 마당에 아시아의 마지막 보루인 일본이 이겨야지, 가 이성이라면,
이 쪽발 쉐이들, 아시아의 축구맹주 조센징이 떨어진 마당에 뉘들이 감히 뷁! 이라는 감정일텐데,

후자가 경기를 보는 그 순간을 지배했다.
된장, 나도 어쩔 수 없는 조센징이구나, 하는 생각이 아련하게 들었고,
그걸 느끼면서도, 나는 승부차기에서 일본 선수가 실축하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기가 끝났다. 일본이 졌다.
라리사 리켈메를 등에 업은 파라과이의 승이 아니라, 일본이 진 것이다!
속은 후련했다. 한도의 한숨 같은 것.
하지만, 이 감정이 머리속에선 불편함으로 둥지를 텃다. 

나는 일본문화에 대해 되레 호감을 가진 편이다.
커피와 카페 문화, 스토리텔링의 향연, 오감을 만족시키곤 하는 영화나 만화, 알흠다운 내 어떤 여신들. 기회가 된다면 일본을 자주 방문하면서 일본과 더 친해지고 싶은 바람도 있다. 과거에 접촉했던 일본인들도 하나같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나는 민족주의에 별반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국경 따위도 불만이다. 국경은 곧 한계를 상정하는 것 아닌가.
다른 세계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왜 그런 울타리로 막아버리는 건가.
누구나 원한다면 이중 국적, 아니 다중 국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데도 왜!!!
이게 다 제도권 교육, 특히 국사교과서 때문에 그런 거야, 라고 치부하고,
일단 접었지만 찝찝하던 찰나, 만났다.

다시 만난 임지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임지현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임지현, 그 이름 때문에 만났다.
만들어진 민족주의가 아닌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사학자.
처음 임지현 교수를 접했던《우리 안의 파시즘》,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 안에 똬리를 튼 파시즘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계기.
그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는 20대의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번 책 역시 만들어진 역사인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으라, 는 기존 율법 차원에서는 과격한(!) 주장을 펴고 있는데,

책의 기조는 역시나 한결 같다. 18명의 과거사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는 가운데, 이성을 마비시킨 채 기득권의 체제유지수단으로 작동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민족주의가 각 인물의 시대나 상황 속에서, 혹은 그 인물의 내면과 행동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콕콕 찝는다.

일본, 집합적 유죄!

아 참,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 전으로 돌아가자. 책을 통해 나는 그 불편함의 정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한일 관계, 임지현의 표현에 따르자면, 식민주의적 죄의식이 작동하는 굴절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나는 내가 받은 제도권 교육의 '국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후예인 일본인 전체를 '집합적 유죄'로, 한국인은 '집합적 무죄'로 간주하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개개인의 행동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본인이냐 한국인이냐에 따라 좌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섬뜩한 이야기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사실 이 논리예요. 너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했는지에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는 그 논리 말입니다. 식민주의적 죄의식이야말로 전형적인 집합적 유죄의 논리지요."(p.48)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 식민주의 역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이 죄인이라는 식의 집합적 유죄를 수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일본 축구팀을 일본과 동일시하면서, '죄인인 뉘들이 한국 축구팀도 좌절한 8강에 감히 어떻게!'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식민지 과거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고, 나는 국사라는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민낯을 접했던 세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국사가 펼친 민족주의의 주술에 묶여 살 수밖에 없는가. 일본 축구팀의 선전을 부러 무시해야 하는 건가. 일본이 잘 되면 배가 아파야만 하는가.  

임지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국사를 넘어서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가간에도 국사를 떠나, 국경을 넘어 각 지역의 삶과 직접 연관되는 문제의 해결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체르노빌에서 비롯된 핵발전소 사업이 그랬으며, 우리에게도 중금속 미세먼지를 잔뜩 안고 한반도를 공습하는 중국의 황사 문제를 거론한다.

"주권의 신성불가침성과 민족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는 한, 황사문제 등을 풀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은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 우리의 삶이 처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국경에 갖혀 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합니다. 국사 패러다임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국가의 경계 속에 가두고 질식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단 상상력을 해방시켜봅시다."(p.381)

역시, 문제는 상상력이다. 어딜가나 그놈이 문제다. 어떤 상상력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게 될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역사에게 필요한 것도 상상력이란다. 그래야 나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국사의 파장에서 벗어나려면 필요한 것도 상상력. 언제 일본팀의 경기를 다시 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책 덕분에 나는 조금씩 그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기대보다 더 흥미진진한 부분이 존재했다. 아는 인물의 경우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았다. 속살까지 훔쳐본 기분이랄까. 해당 인물에 대한 앎이나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었겠지만, 임지현이 특히나 애정을 둔 듯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러했으며, 체 게바라가 그러한 한편,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흥미진진. 

알고 싶다, 마르코스!

뭣보다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마르코스였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신비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집단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방식이 바뀌는 것이 혁명이라고 역설했던 인물.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닌 현실을 만들어가는 담론적 실천이라는 생생한 예를 보여준 마르코스의 말. 열광에 반대하는 사파티스타의 전통 또한 마음에 들었다.

"기존의 체제는 사람들이 이미 결정된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때 안정된 재생산구조를 유지하지, 결코 힘에 의해서만 작동하지는 않지요. 혁명을 국가권력의 쟁취라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상생활과 문화의 영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던 당신의 시도가 소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혁명은 단지 권력을 장악한 정치세력의 교체에 그치고 말 뿐이지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야말로 사파티스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당신의 말은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pp.244~245)

책에서 지적했는데, 현재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과거'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도 그렇다. 사람들의 실천을 지배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식한 현실이라는 것.

선거에서 표를 던지거나 특정한 정책이나 문화적 제안을 지지하는 등의 사회적 실천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의 경험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고정관념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봤고 경험했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이 사회에서 통용된다. "국사는 흔히 이데올로기의 편이다. 한국 민족, 일본 민족, 폴란드 민족, 유대 민족 등을 동질적이고 단일한 실체로 본질화시키기 때문이지요." (p.374)

꼭 세계를 넓혀야 될 의무는 없다. 좁은 세계에서 복작거리다 뒤져도 그만이다. 하지만, 세계를 넓히는 것은 삶을 좀 더 풍성하게 재밌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기반을 제공한다. 엄청 큰 것은 없다.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 18명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터셉트해서 살짝 훔쳐본다고 생각하고 봐도 좋겠다.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당신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나 인물이 나오면 그 재미가 쏠쏠찮다.

알퐁스 도데, 다시 생각해봐라


참, 그리고 왠지 반가웠던 이야기. 나는 계급적 폭력 때문에 알퐁스 도데의 《별》을 무척 싫어하는데(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다면 다시!), 임지현은 알퐁스 도데의 반동성(!)을 알려준다.  

왜 일본과 한국에서 알퐁스 도데가 그렇게 유명하고, 일 제국주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던 《마지막 수업》이 왜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서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언어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교재! 뭐, 연좌제는 아니지만, 악시옹 프랑세즈라는 프랑스 극우파 조직에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 중요한 활동가로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까지.  

옛 기억속에 혹시 알퐁스 도데가 아름답게 미화돼 있다면, 부디 다시 생각해보시라. 《별》이 진짜 아름다운지, 《마지막 수업》이 정말 감동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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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한 달여의 항해를 마치고 닻을 내렸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월드컵 첫 우승, 공식적인 결론은 그렇게.
마스코트 자쿠미와 남아공의 새로운 아이콘 부부젤라는 이제 과거 속으로.

스페인은 '무관의 제왕'이라는 지겨운 수사를 벗고 웅비할 테고,
스페인 아닌 팀들이야, 4년이라는 권토중래의 시간을 가질 테고,
치맥 등과 함께 즐거움을 만끽한 팬들이야 다시 묵묵히 일상과 마주할 터.

내 나름의 이번 월드컵 결산.

1. 지난 2006년 결승전 지단의 박치기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지만,
스페인의 우승을 확정 지은 이니에스타의 결승골 세레모니는 월드컵 피날레로서 손색이 없다.  


경고를 감수하고, 웃통을 벗어던지며 이니에스타가 전한 메시지.
"Dani Jarque siempre con nosotros (다니 하르케, 언제나 우리 곁에 혹은 다니 하르케, 항상 우리는 함께야!)."

지난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한 에스파뇰 주장이자 친구인 다니엘 하르케에게, 그리고 아직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보낸 메시지. 그가 받은 경고는 어쩌면 훈장의 다른 이름. 살아남은 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무엇. 그 아름다웠던 별, 이니에스타. 역시나 소심했던 월드컵에 감동을 안겨준 피날레.  

스페인, 다소 늦된 것 같지만 이번 월드컵 우승, 축하한다. ^^ 
문어의 힘이었나! ㅋㅋ 

 

2. 내게 월드컵은, 알흠다운 몸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장일 뿐 아니라,
세계를 넓힐 수 있는 창이다. 

가령, 예를 들어 지난번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박치기 지단을 통해,
이렇게 나의 세계를 넓힌 경험을 했다.

'박치기' 지단이 아름다운 이유

2006 독일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의 우승으로 ‘공식적인’ 마무리가 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승팀보다 ‘지네딘 지단’을 더 연호하고 있다. 월드컵 우승팀보다 진 팀의 개인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이 기이한 풍경. 특히 결승전 연장에서의 그의 퇴장에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불명예스런 퇴장이었지만, 지단을 향한 애정은 그 퇴장을 더 안타깝게 만들더라.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지단의 퇴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단의 불명예스러운 퇴장은 슬픈 일이다. 지단이 쓸쓸하게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월드컵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행위가 가식 없는 순수한 스포츠맨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지더라도 책략을 부릴 줄 모르는 고수의 모습으로.. 그런 의미에서 지단의 퇴장은 어느 대회 때보다도 소심했던 올해 월드컵의 피날레로 또한 적절했던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이 의견에 동감한다. 지단의 은퇴는 그저 유명 축구스타의 은퇴와 달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적으로 프랑스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지단은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 수상자가 됐다. 서프라이즈~ 지단, 과연 넌 누구냐!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 축구를 그닥 즐겨보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단의 존재감은 내게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이번 월드컵이 그의 마지막 무대라는 사실을 알곤, 적잖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서 결승전에서의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단’. 그렇다 지단의 은퇴경기다. ‘레블뢰’ 유니폼을 입은, 프로 축구선수로서의 그의 몸짓과 발놀림은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월드컵서 ‘늙은 수탉’이니 ‘힘 빠진 호랑이’니 하는 프랑스 대표팀과 함께 지단의 경기력을 놓고 실망하고 조롱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했지만, 상관없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성기 때와 비교해 세월을 머금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다.

지단의 공식 홈페이지(http://www.zidane.fr)


그건 그가 바로 ‘지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단은 ‘축구선수’ 이상이다.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로, ‘에트랑제’(이방인)였던 그는 여느 ‘셀러브리티’(유명인) 축구선수와 달랐다. 그는 최고의 축구선수이자 스타플레이어였지만, 그저 셀러브리티에 머물지 않았다.

지단은 늘 어떤 이슈 앞에 선명한 자신의 생각과 지지를 호소했고, 나는 그 입장에 동의하고 자시고를 떠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이 최고의 축구선수로부터 나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물론 축구선수를 좋아할 때 ‘축구(실력)’만으로 좋아해도 전혀 무방하다. 그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만의 기호일 뿐이다.

어쨌든 내겐 지단을 좋아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차곡차곡 쌓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있는 걸 보고 내 편린들이 마냥 찌질한 것만도 아닌 듯싶은 안도감도..ㅋㅋ 글고 지단의 말을 찌질한 직딩인 나는 다르게 활용해 봐야겠다. “세상에는 직장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지단이 내게 처음 온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그땐 착한 축구실력을 가진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당시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쏘며 프랑스의 우승에 착한 기여를 한 그의 플레이는 인상 깊었다.

지단이 내게로 왔다...

그리고 지단을 새롭게 인식한 계기는 2002년 프랑스의 대선이었다. 당시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이 본선에 올랐다. 참고로 르펜은 98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을 “인위적으로 만든 다인종팀”이라거나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유색인이 너무 많다”며 뻘소리를 해 댄 바 있는 작자다.

여느 축구선수라면 르펜이 본선에 올랐다는 그런 사실로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뭐 그런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어쨌든, 지단의 말은 (프랑스 대선과 상관이 없는 나임에도 왠지) 짜릿했다.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요즘 일어나는 일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극우파의 본선 진출이 달갑지 않던 이들에겐 이 말이 얼마나 짜릿했을까. 일종의 대리만족. 지단은 르펜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그는  상대 후보인 자크 시라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포르투갈서 열린 ‘2004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4). 결승전이라고도 불렸던 프랑스-잉글랜드 예선의 놀라움, 기억하는가. 전광판 시계는 멈추고 0-1 거의 패배 직전의 레블뢰. 추가시간 3분 지단의 드라마 같은 2골이 터지고 레블뢰의 극적인 역전승. 90분간 웃다가 마지막 3분,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슬픔의 도가니탕에 푹 빠져버린 잉글랜드는 주장 데이비드 베컴의 페널티킥 실축을 되새김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경기의 극적인 역전과 지단의 활약상을 리와인드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단의 진가는 경기가 끝난 뒤 나온다. 그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경기가 끝나면 나는 늘 진 팀에 먼저 마음이 가게 된다. 나는 지금 데이비드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함께 뛰는 베컴을 위로한 것이다. 그는 진정한 승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승자로서의 자만보다 패자에 대한 배려심을 잃지 않았다. 승리에 겨워 날뛰는 모습도 좋다. 그만한 자격도 있고, 사람이라면 그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지단의 말은 내게 참으로 인상 깊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연출된 것이라 힐난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진심을 믿고 싶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포르투갈과의 준결승에서 경기가 끝난 뒤 피구에게 건넸을 말도 익히 유추가 된다. 두 남자의 멋진 포옹. 당시 34세(1972년생) 두 동갑내기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보여준 포옹 이상의 무엇. 각각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로 마르세유 뒷골목에서 공을 찼던 지단과, 리스본의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태어난 피구는 뭉클한 무엇을 . 월드컵은 그렇게 단순한 스포츠행사로 그치지 않는다.
 


세월은 흘러 2005년, 프랑스의 이주민들의 집단 저항. ‘폭동’이라 불러대며, 이주자들의 애환과 차별을 애써 무시하고, 프랑스의 분열을 얼토당토않은 ‘순혈주의’의 관점으로 짖어댔던 미친 작자들의 개념없음을 나는 기억한다.

지단은 말했다. “그들의 방화와 파괴 행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극우파의 ‘반이민’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 그를 나는, 기억한다. 그가 단순히 이민자의 아들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출신은 이방인이지만, 프랑스인들 누구도 그를 이방인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것을 넘어선 명실상부한 ‘대표’프랑스인이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에 매년 1, 2위에 오르는 그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그는 차별을 반대한다. 누구보다 차별이 가져올 폐해를 안다.

어쩌면 이번 지단의 퇴장과 관련한 구구한 추측 어쩌면 억측은 그의 태생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마에스트로’를 그라운드에서 몰아낸 이탈리아 마테라치의 입놀림을 놓고 독화술까지 동원되는 판국. 명예로운 은퇴무대를 장식하고 싶었을 지단이 ‘박치기’까지 해가며 퇴장당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

마테라치가 지단에게 무엇을 했는지는 당사자들 외에는 며느리도 모른다. 각국의 언론들은 앞 다퉈 마테라치가 지단 가족을 모욕했다는 얘기, 인종차별 발언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마테라치의 ‘입치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전 세계가 그의 퇴장을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테라치가 지단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시인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좀더 지켜봐야할 듯 싶다.
 

지단의 박치기 장면 캡쳐


지단의 ‘박치기’가 지지를 받는 이유?

지단은 인종차별에 민감한 모습을 보여 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부모 모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의 이민자 2세다. 지단은 98년 월드컵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조별예선에서 상대 선수를 발로 밟아 퇴장을 당한 바 있다. 당시 밟힌 상대는 지단에게 “이 북아프리카 출신의 야만인아”라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행했고, 지단이 이에 발끈했다고 알려졌다.

지단의 분노와 액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앞선 지단의 여러 말과 행동에 근거한다. 말 수 적고 묵직한 지단은 꼭 필요할 때 잊지 않고 입을 열고, 르펜을 반대했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지단은 그와 관련,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법하며 인종차별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아킬레스건이다. 지단의 아버지는 알제리 산악지역 소수민족 출신으로 알제리의 독립투쟁 때 프랑스 편에 서서 싸운 전력 때문에 알제리 이민자들로부터도 냉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프랑스 정부의 검열과 주류 언론의 은폐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1년 10월17일의 ‘파리대학살’이 정점에 있다. 프랑스 식민지를 벗어나 프랑스에 거주하던 알제리 이민자들에겐 통금령이 부여돼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차별이었다. 이에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주도가 돼 이를 해제해 달라며 수천명의 알제리인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무력진압에 나섰다. 총기는 불을 뿜었고 200여명의 알제리인이 학살당했고, 센강으로 던져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 경찰은 무력충돌은 우연이었으며 단 3명의 알제리인만이 숨졌다고 ‘거짓’ 발표했다. 이 학살은 2차대전 중 나치에 협력, 유대인을 프랑스에서 쫓아냈던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차별·분리주의 정책의 되풀이. 프랑스 정부는 이를 쉬쉬하다가 1988년에야 학살극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패를 세웠다. 그러나 아직 단 한명의 학살 가담자도 정식 기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가 짊어진 식민지배와 학살의 부채감은 아직 남아있다.

지단이 인종차별에 대해 유난 민감한 것도 이런 점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아직 명확한 이유는 밝히질 않았지만, 그의 퇴장이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연관이 돼 있을 것이란 추정이 박치기가 지지받는 이유가 아닐까도 싶다.

지단이 아름다운 이유

그랬다. 지단은 그저 셀러브리티에만 그치지 않았다. 최고의 축구선수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친선대사로 가난한 자의 편에 섰고 장애 아동을 돕는 모임에 성심껏 참여한다고 한다. 사실 나는 “축구선수는 축구만 잘하면 되지”라는 말에 반대하지 않고 그닥 거부감도 없다. 누구든 선수를 좋아하고 말고 하는데 자신만의 기준이나 취향만 있음 된다. 이건 옳고 그름도 아니고 그저 호불호다.

그래서 나는 베컴,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박지성 등등도 나름 좋아한다. 그들은 축구 잘하는 선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단과 같은 존재감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나는 지단을 존중하고 그의 말과 행동에 귀를 기울인다. 지단은 내게 축구만이 아닌 ‘세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지단의 마지막 게임이기에 나는 어설프게도 프랑스가 승리하길 바랬다. 누가 이겨도 사실 상관없지만, 내가 존중하고 좋아하는 지단이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지 않았겠는가.

[지단, 21세기의 초상]의 한 장면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단에 대한 다큐, < 지단, 21세기의 초상 >(Zidane, Un Portrait Du Xxie Siecle)을 봐주는 센스. 참고로 이 영화는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 단순하게 지단의 축구인생을 조명하는 다큐가 아니란다. 지난해 4월23일 비야레알과의 경기, 17대의 카메라가 동원돼 지단 한 명만을 좇는 이야기(?).


공동 연출을 맡은 파레노감독의 말에서도 한 가지 팁을 얻자. “제작진은 21세기를 대표하는 한 남자의 초상을 그리고 싶었고 지단이 이 주제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데 착안했다. 지단은 축구팬들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축구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고 인물이다. 기획 때부터 지단을 염두에 뒀으며 그가 수락하지 않으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의 떠남이 아쉽지만, 그가 아예 우리 곁을 떠나는 건 아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지 않은가^^;; 중원의 지휘자, 마에스트로.. 그를 명명하는 숱한 닉네임들은 오로지 지단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가 아니면 감히 누가 달쏜가.

박수칠 때 떠나라~

특히나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음에 더욱 믿음이 간다. 월드컵에서도 힘든 모습을 보이며 체력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모습을 보였던 그였기에, 앞선 그의 은퇴 발언은 남달랐다. “지금까지 해 온 것만큼 잘할 수 없을 것 같아 은퇴를 결심했다.” 지난 2001년 현 소속팀 레알마드리드로 옮길 때 그의 몸값은 무려 7200만유로(860억원), 한해 연봉만 80~90억원에 이른다. 그저 한해 정도 더 뛰어도 엄청난 연봉이 보장되지만, 그는 지금까지 해 온 것만큼 잘할 자신이 없어 은퇴한단다. 여느 찌질한 한국의 노블레스들과 다르다.

이럴 때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친다. “박수칠 때 떠나라”를 몸소 실천하는 그에게. 지단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이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마에스트로의 퇴장은 한 시대 축구의 역사가 접히는 순간과도 같지 않은가.

뭐 지단이 저 멀리, 말도 통하지 않는, 찌질한, 청년의 서툰 연서에 고마워할 일도, 신경쓸 일도 없겠지만, 그냥 한마디 해야겠다.ㅋㅋ

지단 행님~ 수고했어요. 그라운드에서의 당신 모습은 마지막이겠죠? 앞으론 더 볼 수 없게 될 터이니, 아쉽긴 해도 축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지만, 당신이 있어 그래도 이 세계가 약간은 덜 슬퍼진 것 같네요. 아름다운 당신, 고맙습니다. 꾸벅 ^.^

'(내가 발붙이고 있는) 세계를, 세상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사람'
나는 그래서 지단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지단은 어떤가?


축구선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세계를 사유하게 해주는지 알려준 좋은 예.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 축구팀은 비록 예선전에서의 논란을 비롯해 월드컵에서 거둔 성적 때문에 국가적인 풍파를 겪었지만,
지단도 그 논란의 와중에 입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내게 지단은, 세계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든 알흠다운 사람.

이번에도 나는, 드록바와 정대세를 통해, 독일 축구팀을 통해 세계를 엿봤다.

우선, '드록신'이라 불리는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록바(첼시). 
과거 그 이름과 명성을 들은 바 있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 좀 더 확실히 알았다. 그가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런 말을 봤다.  
"드록바는 검은 예수다." 혹은,
"드록바는 검은 예수가 아니다. 예수가 하얀 드록바다. 록렐루야."
왜 이렇게 말을 할까. 단지 축구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궁금했다.

아쉽게 16강에 진출 못하고 예선전에서 탈락한 코드디부아르는,
그 이름도 생소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의 세계 최대 코코아 생산국이다.
코코아라고 하니 공정무역 초콜릿도 확 떠올랐는데.

코트디부아르의 아픔을, 세계의 상처를 전달한 메신저가 드록신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코트디는 2002년부터 5년간 내전을 겪었다.
반군인 북부 이슬람 세력은 정부를 장악한 남부 기독교 세력이 코코아 수출의 이득을 갈취하고 있다며 쿠데타를 기도했다 실패, 이내 내전이 벌어졌다.

'피의 초콜릿(blood chocolate)'.
반군과 정부군의 전쟁자금 조달책으로 사용된 코코아.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가 먹었던 초콜릿이 저 먼 곳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충격적인 사실.

드록신은 그런 와중에, 지난 2005년 10월, 무릎을 꿇고 이렇게 호소했단다.
2006 독일월드컵 본선 티켓을 획득한 직후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였다.

"사랑하는 조국의 국민 여러분. 적어도 1주일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춥시다."

정부군과 반군은 드록신의 호소에 총질을 멈췄다.
그것이 비록 1주일이었다고는 하나,
건국 최초로 총성이 울리지 않았던 평화의 순간을 만들었다.
2년 뒤, 코트디부아르 내전은 종식됐고.


드록신이 만든 평화의 순간. 한 명의 축구선수가 만들 수 있는 평화의 시간.
축구만 잘해도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몸으로 실천했다.

드록신은,
2007년 꾸준한 자선활동과 아프리카의 문제점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공로로 UN 홍보대사로 임명됐으며,
2008년 디디에 드록바 자선 협회를 설립, 자신의 재산은 물론 첼시 선수들과 구단주를 설득, 그들의 도움을 얻어 아프리카 지역에 의약품 및 식음료, 축구공과 유소년시설 등의 지원을 시작했고,
2009년 개인재산 60억을 코트디부아르 종합병원 자금으로 기부하는 한편,
2009년 나이키의 아프리카대륙의 교육환경 개선 및 에이즈 치료를 위한 Lace up & save lives 캠페인 동참,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왜 그에게 드록'신(神)'이라는 작명을 선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상 등으로 이번 월드컵에서 그의 활약을 충분히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다시 초콜릿을 생각하고, 코트디부아르와 아프리카의 현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드록신에게 감사를! 인민을 위한 축구선수, 하나.


축구선수로서 드록신을 가장 닮고 싶다고 한,  
인간 불도저, 인민 루니, 우리 빠박이 정대세(의 눈물)도 빠질 수 없겠다.

대세(大世). 이름, 재밌다 싶었더니, 이런 뜻.
'세계를 향해 크게 날개를 펼치라.'
그렇다면 그는 이름대로 비상본능을 발휘하고 있는 셈. 당연히 현재진행형.
언젠가 혹시나 나도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의 이름은 대세로.^^
물론 미래의 아내에게도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대세는 한국 국적을 가진 북조선 축구선수로 월드컵에 출전했다.
이땅의 분단 현실이 가져온 기묘한 조합인데,
그에겐 또 하나의 세계 혹은 국적(나라)가 있다.
"나의 모국은 일본이 아니에요. 일본 속에 또 하나의 나라가 있죠. 바로 '재일'이라는 나라에요. 북한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 '재일'이라는 나라가 나의 모국이고 재일인이라는 존재를 널리 세상을 향해 알리는 것이 제 삶의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세상은 어디에든 속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는 가뿐히 그것을 넘어선다. 
재일(在日). 자이니치.
지구 어디에도 없는 국적이며, 
그것은 어쩌면 분단의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지만,  
그는 단독자처럼 당당하고 세계의 옹졸함과 구획짓기를 폭로한다.  

물론 그는 '조선'적을 갖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법적인 한계로 그리 못했지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재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가 피난 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재난 발생지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짓"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넘어선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저 자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축구공을 잘 차는 축구선수로서 그의 진가는 이미 확인됐고,
대세를 통해 나는 볼 잘 차는 것 이상의 사회적 인간을 만난다.
누군가는 볼이나 잘 차면 되지, '왠 오지랖?'이라 여길지 몰라도,
나는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자세에 감동 한 방 먹는다.

"지구온난화로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걸 걱정하다 잠 못 자고, 아프리카가 서서히 사막화되는 걱정으로 밤중에 모금함에 돈을 넣으러 편의점에 가는 등 별짓을 다 합니다."

뭣보다 대세는 눈물이 흔해빠진 남자. 사내자식이 뭔 눈물이냐고?
아니, 그의 정서적 감응 '능력'이야말로, 그가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아녔을까. 물론 혼자만의 생각. ^^; 

"이제까지 몇 리터나 되는 눈물을 흘렸을지. 애정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겨울연가>를 볼 때도 울어버렸습니다. 대자연의 동물들을 보여주는 프로에 특히 약합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계의 냉혹함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여성 팬 여러분, 이런 남자는 안 됩니까?"
 
멋지다. 정대세.
중국의 한 여성이 그에게 결혼해달라는 구애동영상을 날리는 것,
끄덕끄덕할 만하다.

그래, 대세의 세계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 세계를 통해 나 역시 세계를 만나고 넓힌다. 
고맙다, 대세. 


내가 이번 월드컵을 즐길 수 있었던 아주 충분한 이유. 
인민을 위한 축구선수(들)는 있다.
 
더불어, 일부 오해("준수는 야큐만 좋아하고 축구를 싫어한다")에 대한 해명(?).
축구(경기 뛰기)를 무척 좋아하는만큼, 축구(경기 보기)도 좋아한다. 
특히나 세계 쵝앙의 선수들이 펼치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그 근육들끼리의 파열과 재간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다만, 월드컵에서 내가 거북살스러운 것은,
빨간색 옷을 한결같이 맞춰입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한민국.
그 안에 내재된 듯한 광기를 띤 집단적인 열정.
분별없는 열정이라 불러도 좋을 그 과도함. 
즉, fanaticism. '광신주의'라고 해석되는 그 무엇 때문이다. 

혹자는 내게 '넌 애국심도 없냐'고 타박 혹은 농담을 건네는데,
나는 축구를 통해 발현되는 일종의 패나티시즘이 영 불편하다.
애국심, 일치단결, 조국을 향한 과도한 열정 같은 것을 강요하는 기제로서의 축구가 못마땅할 뿐. 

그것이 축구의 속성이라고? 
글쎄, 노동자의 운동으로 탄생했던 축구의 태생을 보자면, 그건 과도하다.
유추하건대, 국가를 대입하는 건, 지배세력의 농간(?)이 아녔을까.

내가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에 애정이 가장 많이 투영됐던 건,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졌을 때였다.
빗속 차두리의 눈물. 흙.


어느 경기든 끝났을 때,
나는 이긴 팀 선수들의 희희낙락 미소보다,
진 팀 선수들의 낙심한 표정에 더욱 눈이 꽂히고 마음이 짠했다.

4년 후, 나도 기다린다.
월드컵을 통해 내 세계도 그것이 아주 초큼이라도, 넓어질 테니까.

당신도, 이번 월드컵 잘 보셨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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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사는 것이기보다 버티고 견디는 것,
이라고 믿는 내게,
선택은 그래서 중요하다.
버티고 견딜 수 있는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 

사회적기업가 학교를 선택했다.
다행이다. 낙마 안 했다. 수료했다.
장하다. 나에게 토닥토닥. 
 
그럼에도, 나는 안다.
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잘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솔직히,
나는 사회적기업이 이 미친 세상의 완벽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회적기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글쎄.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진짜' 혁명이 아니면 안된다.
기득권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그런 혁명.
사람이 희망이라고?  
음,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기보다 사람의 가변성을 믿는다.
아침의 주림을 저녁의 다담상으로 잊는 것이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물론, 아주 사소하고 작은 균열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것이다. 아마도.
김성기 교수님이 뒷풀이에서 물었다. 무엇이 좋았고 아쉬운 건 뭐였냐고.
나는 좋은 것에 대해선 그랬다.
다른 무엇보다 비슷한 마음을 가진 동지들을 만난 것이 가장 좋았다고.

마음의 동지.
나는 그것이 영원하리란 기대 따윈 않는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동지들의 마음이 앞으로 어떤 행동으로 발현되고,
어떻게 더 잘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설프게 이런 생각은 있다.
우리 동지들이 메이저가 아닌 '인디'로 계속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디는 자본의 극강마수에 포섭되지 않고,
무한이윤과 암세포의 성장이 미덕인 흉포한 자본에 복무하지 않는 것.
인디는 그 자체로 정체성이자, 삶의 태도와 자세다.  
인디에서 메이저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디 그 자체로 한결같이 살면서 달팽이의 속도로 꾸준히 거니는 것.
그것을 확고히 믿는다거나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좋겠다.

사회적기업(가)이,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시대적 대세(트렌드)로서 자리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라면,
꾸준히 일관되게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내가 그랬으면 좋겠고, 누군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절망의 구》에 대한 서평이었을 것이다. 이런 말이었다.
"가장 끔찍한 건 절망의 구에 쫓겨 달아나면서 점점 그 구를 닮아가는,
자신 속에 잠재된 구를 보지 못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다."

아니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면,
나는, 우리는, 과감히 이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신영복 선생님을 뵀다.
가장 보통의 사람인 내게 이런 영광이 올 줄은 몰랐다.
더구나 신영복 선생님 이름이 박힌 수료증, 거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수료생 가운데 사회적기업을 일군 사람을 위해선,
직접 캘리그래피를 써주시겠다고 하셨다.
이거, 확 구미 '땡'기는 제안이지 않은가.
 


어쨌든,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크게 울 줄 알고
누구보다 견디고 버틸 줄 알며
누구보다 정당하게 분노할 줄 아는데다
누구보다 싸울 줄 아는 한편
누구보다 용서할 줄 아는,

그런 사람.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내 희망사항.

아, 그러기 위해서는,
파라과이가 우승했어야 했다. ㅠ.ㅠ
파라과이 축구팀이 8강전에서 떨어져서 너므너므 아쉬웁따!

왜냐고? 에이, 알면서 뭘 물어보나!
'형제의 나라, 파라과이'니 뭐니 하는 호들갑은 떨지 않겠다.
다만, .....................................


.........................다시 태어난다면, 음, 그녀의 휴대폰으로 태어나는 것, 
안되겠니, 응? ^^;;  

뭐? 변태라고? 맞다, 난 변태준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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